횡단보도 앞에서 나비들을 만났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노랑나비 두 마리가 춤을 추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는가 싶으면 멀어지고, 멀어졌는가 하면 다시 서로를 향해 하늘거리며 다가왔다. 만났다 헤어지는 인연의 춤을 멋들어지게 추다가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손을 잡듯 다정하게 길 건너로 날아갔다. 연인인지 자매인지 더없이 다정스런 그들을 보면서 바쁜 걸음도 잊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잠깐의 춤사위 속에서 금빛 나래를 너울대던 그들은 까무룩 멀어지더니 이제 자취도 보이질 않았다. 사라져간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오래 전에 한 마리 나비처럼 날아 가버린 동생 얼굴이 떠올랐다.
나에게는 두 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다. 그 아이는 나와 달리 성격이 똑 부러지고 명랑했다. 막내에다가 얼굴까지 예뻤던 동생은 늘 생글거리며 재롱을 떨어 주위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더구나 엄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했기 때문인지 그 기세를 등에 업고 뭐든지 제 고집대로 하려고 했다. 그랬기에 나는 늘 동생에게 밀리는 기분이었다.
어느 봄날이었다. 동생이 포도나무에 분홍색 순(筍)이 예뻤던지 한 움큼을 따왔다. 나는 아버지가 보실까봐 얼른 빼앗았지만 울음을 터뜨린 동생 때문에 아버지께 들키고 말았다. 그날 동생을 잘 감시하지 못하고 방관한 죄는 온통 내가 뒤집어썼다. 눈물콧물 쏙 빠지게 한바탕 야단을 맞은 후, 철없던 나는 차라리 동생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내게 벌을 내리신 것일까. 동생과 밤새 사과 하나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동생은 얼굴이 벌게진 채 일어나질 못했다. 단순한 감기몸살 정도로 생각하고 동생에게 장난을 치려던 나는, 안절부절 못하시는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며 언니들 뒤에 숨어서 숨도 크게 못 쉬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심각한 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금방 일어날 줄만 알았다. 그러다가 아이가 홍역인걸 알고는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너무 늦게 대처한 까닭에 그 아이는 “언니!” 소리도 한 번 못해보고 영영 가버리고 말았다. 너무 어이없이 일을 당하고보니 남은 것은 후회와 원망뿐이었다. 그 중에 가장 원망스러웠던 것이 불편한 교통이었다. 워낙 산골이다 보니 환자가 생기면 무조건 업고 삼 십리 길을 달려야 했는데 구불구불한 고갯길은 마음만 급했지 모든 조건이 따라주질 않았다. 전화만 있었어도 화는 면했으련만 전기조차도 없었던 불편한 시절이었으니 어느새 아득히 먼 옛이야기만 같다.
그 아이는 가족들의 웃음까지 모두 걷어 가버려 집 안팎에는 한 동안 적막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나는 너무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서인지 아니면 너무 어렸기 때문인지 가족들의 눈치만 살피며 고양이 걸음만 했을 뿐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싫어서 친구 집에 자주 갔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다만 지금까지 생각나는 것은 아버지가 그렇게 슬프게 우셨던 적은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기억뿐이다.
여섯 살 쯤의 일인데도 살아오면서 두고두고 나를 괴롭히는 것은 동생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늘 다투기만 했던 기억이다. 물론 어렸기에 그랬겠지만 잘해준 것은 전혀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렇다고 늘 다투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기억 저편에 있는 동생은, 나 때문에 울어대던 네 살배기로 남아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지금, 동생이 내 옆에 있다면 난 모든 걸 양보하며 사랑해 줄 터인데. 언니가 가진 것은 무조건 달라고 생떼를 쓰더라도 나는, “그래그래”하며 다 내어 주리라.
그러나 사랑도 다 때가 있는 법, 아무리 주고 싶어도 그 사랑을 줄 수가 없기에 난 또 마음이 아프다. 나는 동생에게 준 것이 하나도 없지만 동생은 내게 귀중한 것을 주고 갔다.
감촉할 수는 없지만 나는 가끔 마음의 손으로 동생이 주고 간 선물을 펼치곤 한다.
나비를 만난 오늘 같은 날에 말이다. 그것은 세월이 흘러도 선명하게 가슴에 남아 나에게 일러준다. ‘사랑 할 수 있을 때 사랑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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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09-02-16 16:0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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