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기로 흐르던 중랑천이 장안교 못 미처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작은 섬이 하나 생겨났다. 겨울로 접어들면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그 섬은 이편 둑과 저편 둑 사이, 물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물살에 금방이라도 떠내려 갈 것같이 작았는데 지금은 텃밭이라도 만들고 싶게 커졌다. 거기엔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 없이 새들의 발자국만이 어지럽게 찍혀있다. 알타미라의 상형문자 같은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쓸쓸하다’라는 우리말로 읽어내고는 한다.
혹 징검다리라도 놓여있다면 저리 적막해 보이지는 않으련만. 그렇다고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소통의 다리가 어찌 저 곳에만 필요하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 아니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가 고도(孤島)인 것을. 그러기에 사람들은 혈연, 지연, 학연으로 끈끈하게 다리를 놓아 얽히기를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다. 어찌어찌 하다가 수평의 다리를 잃은 이는 그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하늘로 다리를 놓기도 한다.
산골로 들어가 홀로 움막을 짓고 돌탑을 쌓으며 사는 김 노인이 그런 사람이다. T.V화면에 비친 그의 긴 수염과 어깨를 덮는 백발은 전설 속에서 보듯 신비로웠다. 그 날 화면에서 본 그는 계곡으로 내려가 돌을 들어 올려 산 중턱에 하나하나 쌓아 올렸다. 한 층, 두 층 하늘을 향해 다리를 놓아가면서 돌과 돌 사이에 틈이 생기면 작은 돌로 단단히 쐐기를 박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쌓으면 웬만한 태풍이 불어도 끄떡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생에는 대체 어떤 바람이 불어 수평의 다리를 잃고 하늘로 다리를 쌓아올리는 것일까? 노인은, 탑의 모양이 얼추 갖춰지자 돌탑에서 내려와 허리를 폈다.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허연 수염이 스산하게 흔들렸다. 그러는 그도 영락없이 건널 수 없는 섬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에도 오래 전에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섬 같은 그런 사람 하나가 들어 있다.
성원이 삼촌. 황해도가 고향인 그는, 우리 어머니와는 한 동향 사람이었다. 피붙이 하나 없는 타향에서 만난 우리 어머니를 누님이라 부르며 우리 집에 자주 들르곤 했다. 어느새 나도 그를 ‘성원이 삼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성원이 삼촌이 사십을 갓 넘겼을 때 다행히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여인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들은 부엌도 없는 허름한 문간방에 살림을 차렸지만 연탄화덕 위에서 뜸 들고 있는 밥솥처럼 훈훈하게 서로를 감싸며 살았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아내와 아이 둘이 자신을 기다려 주는 가정을 가진 아버지였다. 그래서 그는 힘에 부치는 과일 수레를 끌며 가파른 빙판 길을 오르내리면서도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가정에 병마가 몰아칠 줄이야. 아직 젖 냄새가 가시지 않은 아이 둘을 남겨 놓고 그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더 기가 막힌 일은 달포이상을 술로만 지새우던 그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 것이다. 남아있는 것은 아이 둘과 빈 수레, 그리고 차가운 방바닥에 던져 놓은 편지 한 장이었다. ‘자기는 다시 돌아오지 못 할 것이며 아이들에게 좋은 양부모를 찾아주라’는 글이 그 편지에 써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어머니를 통해 들었다.
우리는, 어쩌면 크고 작은 상처를 안은 채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물결에 휘둘리며 사는 섬 같은 존재들 일 지도 모르겠다. 어떤 고상한 이유로도 나만을 위한 ‘탑쌓기’는 섬 안의 또 하나의 섬을 만들 뿐이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믿음과 사랑의 다리를 하나하나 놓아 간다면 혹 거센 불황과 불신의 파도가 온다 하더라도 어이없는 절망으로 희망을 잃지 않는 섬이 되지 않을까.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나무와 새와 사람을 키우는 품 넓은 섬, 누구에게라도 기쁘게 닿는 다리를 가진 행복한 섬이면 오죽 좋으랴. 그렇게만 된다면 삼십 년 전에 머나먼 이국으로 입양을 간 성원이 삼촌의 아이들에게까지 행복의 다리가 닿을 줄 누가 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