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이 반짝이는 가로수를 따라 낯선 길을 간다. 강변엔 얼음 터지는 소리. 그래도 물새는 마냥 즐겁다. 앞산을 돌아 몰아온 매운바람에 돌꾼들은 옷깃을 여며도, 따사로운 햇살이 그리워 눈을 헤치고 살며시 드러내는 돌들의 수줍은 알몸에 마음이 설렌다.
나 같은 돌꾼들이 계절을 아랑곳하지 않고 돌밭을 찾는 건 군자석(君子石)을 만나기 위해서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지만, 나는 돌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아무 돌이나 덥석덥석 집어 오지는 않는다.
우선, 매만지는 손끝이 여인의 엷은 미소처럼 부드럽고 속살만큼이나 매끄러운 감촉을 주는 돌을 나는 좋아한다. 그리고 덕성스러우면서도 우둔하지 않고, 날렵하지만 경솔하지 않으며, 준수하나 거만해 보이지 않는 그런 돌이 나는 좋다. 또 내가 좋아하는 돌은 갖은 풍상 속에서 인고(忍苦)의 세월을 겪어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기림에도 의연하며 무지한 자의 비난에 초연해야 한다. 그 위에 수다스럽거나 촐랑거리지 않으며 귀공자다운 반듯한 용모를 갖추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산은 인자(仁者)의 거울이요, 물이 지자(知者)의 거울이듯, 군자석은 수석인의 거울이다. 또한 나의 거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즘의 나에겐 군자석을 찾기가 군자를 만나기만큼이나 어렵다. 그건 나의 눈이 그만큼 무뎌진 때문일 것이다. 아니, 내 스스로가 김묵(金默)처럼 속세에 물든 탓인지도 모른다.
신라 경주에 김묵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당나라 사신(使臣)이 그의 집 앞을 지나가다 담장에 박힌 푸른 돌을 보았다. 그는 집주인인 김묵에게 100냥을 줄 터이니 그 푸른 돌을 달라고 했다. 욕심스런 주인이 1,000냥을 내라고 하자 돈이 모자란 당사신은 그대로 돌아갔다. 그러자 김묵은, 분명히 돌 안에 황금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돌을 깨 보았다. 그랬더니 거기에서 물이 쏟아지며 금붕어 두 마리가 튀어나와 이내 죽고 말았다.
이듬해 당사신이 다시 찾아와 1,000냥을 내놓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당사신은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다. 그 돌을 오래 두면 푸른빛이 더욱 선명해져서 그 속에서 놀고 있는 금붕어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금붕어를 보는 사람은 불로장생(不老長生)할 수 있다고.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김묵은 실신하고 말았다.
또 한 차례 찬바람이 강을 건너와 여민 옷깃을 헤치며 가슴으로 파고든다. 마음이 춥다. 발아래 숱하게 널린 돌 가운데에서 군자다운 돌 한 점을 만날 수가 없다. 고작해야 칠십 인생도 미처 헤아리지 못하면서 천만 년 세월을 읽으려는 자만(自滿)이 눈을 멀게 한 탓이다. 눈이 멀었으니 어석(魚石)을 깬 김묵의 욕심이 아니 생길 수 없다.
자만(自慢)이 눈을 멀게 하고, 욕심이 무지에서 오는 걸 이제 알겠다.
찬바람이 오히려 상쾌하다. 어느 날 다시 군자석을 찾아 낯선 길을 나서리라. 자만으로 멀어버린 눈을 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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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09-02-16 17:29: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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