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도 보은의 달 전국 편지쓰기 대회에 응모한 250여 작품의 심사를 꼬박 닷새 동안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어떤 작품은 몇 번씩 읽고 또 읽어가며 심사를 했다. 그랬더니, 안 그래도 약한 시력이 극한 상황으로 떨어져 마치 안개가 자욱이 낀 듯하고, 작품 속에 푹 빠져들어 함께 울고 웃느라, 마치 환상의 동굴 속을 헤매고 나온 듯 정신이 몽롱한 느낌이 든다.
70을 넘긴 노인이 그동안 소홀히 대했던 아내에게 보내는 뉘우침과 새로운 다짐의 편지,
십여 년 전 중학교 때의 은사가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독학으로 대학을 다니는 제자에게 쓴 격려의 편지, 거꾸로 초등학교 때 일기 쓰기 숙제를 해 가면 항상 자상한 도움말을 써 주셨던 선생님에게 그 때의 그 지도가 자신의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고마움을 표하는 글 등 주옥같은 사연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에 깊은 감동의 파문을 일으킨 작품은 청각장애에 농아이기도 한 자신의 언니에게 쓴, 한 여고생의 편지였다.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선천적 장애를 안고 태어난 언니에게 부모님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바람에 연년생인 자신은 항상 무관심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다닐 때도 다른 애들은 언니가 있어 늘 울타리가 되어주는데 반해서 자신은 그런 방패막이 없는 것에 더하여 ‘벙어리에 귀머거리 동생’이라며 놀림감이 되었고, 집에서의 잔심부름이나 집안일 도움도 온통 자기 혼자만의 몫이었다. 따라서 늘 불만과 슬픔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래도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생업에 바쁜 부모님 말고는 자기밖에 언니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틈나는 대로 언니 돌보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런데 한정된 사람들 하고만 대화하는 것보다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은 소망으로 수화(手話)를 배우는 대신 말하는 사람의 입모습을 보고 말뜻을 알아내는 연습을 원하는 언니에게 그 훈련 상대가 되어주어서 이제 정상인만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경지에 이른 언니에게 그 피나는 노력의 가상함을 치하하면서 착한 영혼의 소유자인 언니가 장애를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며 그 과정에서 열심히 도운 경험이 봉사 정신의 바탕이 되어 자신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언니가 너무 고맙다는 말로 편지를 맺고 있다.
어린시절에 차별받고 그로 인해 괴로웠던 것에 대한 솔직한 표현도 좋았고, 차차 철 들어가면서 그것이 그냥 지워진 짐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고 그걸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보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 좋은 계기였다고 생각하고 봉사를 실천해 나가는 것과 그러한 자기 성장에 언니가 큰 몫을 해 주었음을 인정하는 내용이 읽는 나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우체국 생활 40 년을 살아온 나로서 편지와의 인연을 말하는 것은 어쩌면 진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편지에 얽힌 아주 특별한 사연을, 그 것도 몇 가지나 가지고 있다.
첫 번째의 사연은 아직 우체국에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그 준비 단계인 체신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 봄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청주 사범학교의 한 아무개 여학생과의 펜팔이 그것이다. 소형 카메라 사진을 교환하면서 한 육 개월 동안 우리는 고등학생간의 펜팔답게 담담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주 일회 정도 주고받았다. 그 해 가을이었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던 나는 그녀를 만나러 청주로 갔다. 소개해준 친구와 그의 여자친구까지 합해서 네 사람이 만나 저녁을 곁들인 데이트를 하고 아쉬운 작별을 고한 채 돌아와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녀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내가 전과는 사뭇 다른 내용으로 소위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칼로 싹 자르듯 그녀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 이후 2년 반 동안 나는 단 한 통의 답장도 받지 못하면서 자그마치 450여 통이나 되는 편지를 보냈다. 그 무렵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의 전기를 읽었는데 그가 한 여인을 사랑하여 장장 이십여 년 간 편지를 하여 결국 그녀와 결혼하게 된 사실을 보고 그의 전철이라도 밟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그렇게 가슴 아픈 세월이 흘러 2년 반이 지나고, 학교를 졸업한 후 목포우체국에 취직하여 근무하던 어느 날 눈에 익은 글씨체의 편지 한 통이 그녀의 집 주소에서 날아왔다. 그런데 이름은 마지막 한 자가 다른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반가운 생각에 허겁지겁 개봉하여 읽는데 너무나도 충격적인 내용에 난 그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에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용인즉 발송인이, 내 구원의 여인의 언니인데 자기 동생이 몇 년 전부터 폐결핵을 앓다가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망자의 소지품을 태우다가 내가 보낸 편지 450여 통을 발견했는데 그 편지 한 통 한 통마다 동생이 써서 부치지 못한 답장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한 없이 사랑하면서도 자신이 머지않아 죽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것이어서 안 그래도 피지도 못한 채 요절한 동생의 죽음에 아픈 가슴을 더욱 더 후벼 파는 듯하여 감당키 어려운 지경에 있으므로 이제 더 이상 편지를 보내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맺는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 년 반이 넘도록 답장 한 통 보내지 않는 그녀를 얼마나 서운하게 생각했던가.
두 번째는 목포 우체국 근무를 시작하고 나서 한 일년 쯤 지난 때에 일어난 일이다. 하루는 집배원들이 수집해온 우편물을 정리하여 일부인(日附印)을 찍으려는데 예쁜 글씨체로 쓰인 엽서가 한 이백 여 통 뭉치로 쏟아지는 것이었다. 인쇄된 것도 아니고 일일이 손으로 쓴 그 많은 엽서가 가뜩이나 호기심 많은 내 눈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것. 확인해 본 결과 엽서는 이화여대에 다니는 한 여학생이 방학을 맞아 목포의 집에 돌아와서 한 열흘 지내다가 전국의 친구들에게 보낸 안부편지인데 그 내용이 한결같이 목포가 너무 한적한 시골이어서 방학 한 달을 무료하게 보낼 일이 지금부터 걱정이라는 엄살이었다. 서울에서 학교 다닐 때 방학이 되어 시골 고향에 돌아오면 어찌나 한 달이 빨리 가는지 마냥 아쉽기만 했던 내 경험을 비추어 볼 때 그녀의 가족에 대한, 그리고 고향에 대한 옅은 애정에 분개(?)한 나는 발송인 주소로 엽서를 보냈다. 도대체 그렇게 고향에 대하여 데면데면할 수 있느냐고, 점잖게 나무라고 그토록 이곳에서 시간 보내기가 무료하고 답답하거든 내게 연락하면 근무
시간 이후 시간을 당신을 위해 할애할 용의가 있으니 그럴 생각이 있거든 약속한 장소로 나오라고 시내의 한 다방을 지정하여 만날 시간을 제시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므로 표적 삼아 차탁에 프로이드의 ‘심리학개론을 펼쳐두고 읽겠다고 했는데 재미있는 건 자기가 약속한 장소에 나온 이유가 시골 우체국 직원이 그토록 고급 학문 서적을 읽는다는 게 신기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남의 편지를 보고 시비를 건 나나 우체국 직원을 깔본 그녀의 당돌함이 우리의 만남을 성사시킨 것이라 할 수 있거니와 남은 방학기간 이십여 일, 우리는 유달산으로 영산강으로 그리고 고하도나 흑산도 등으로 돌아다니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 있었다. 젊은 한 때의 객기였다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1983년 밀양우체국장으로 부임하여 시작한 학생 편지쓰기 대회에서 응모작을 심사하다가 너무도 감동적인 편지를 보며 눈이 붓도록 울었던 기억이다.
중학교 이학년 여학생의 편지였는데 제목이 ‘시집간 엄마에게’로 되어있어 우선 인상적이었고 내용은 다섯 살 무렵 자기를 버리고 개가해 간 엄마에게 그동안 연로하신 할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엄마 없는 서러움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지만 이젠 중학생이 될 만큼 자라서 한 시름 덜었는데 개가해서 이룬 새 가정에서 낳은 동생에게 또 엄마 잃은 슬픔을 안겨줄 수는 없으므로 다시는 시집가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염원을 담은 편지였다.
83년 이래 임지를 바꿔 가며 근무하면서 중단하지 않고 편지쓰기 운동을 펼치면서, 특히 응모작을 심사하면서 내가 느낀 자부심은 나름대로 대단한 것이었다. 조급하기만 한 우리 국민의 심성을 누그러뜨리는데 한 몫을 할 편지쓰기를 직무의 하나로 펼칠 수 있고 사람들의 마음속 은밀한 곳의 정서를 통신 비밀 보호법에 저촉되는 일 없이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말이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일했던 평생직장, 우체국을 떠난 지도 어언 5년, 짧은 세월이 아닌데도 일년에 두 번 편지글 심사를 하면서 편지와 나의 두터운 인연의 끈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기는 편지쓰기가 다만 이벤트에 참가하는 일환으로서가 아니라 생활의 한 방편이 되어 정서 순화와 글쓰기 실력 배양에 도움이 되는 날이 왔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