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수필]

일모 도원(日暮途遠)     박광정

드디어 시작종이 울리고, 나는 교과서를 옆에 끼고 교무실문을 나섰다. 긴 복도를 따라 교실로 향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생애의 반을 묻었던 교직 생활에서 이제 마지막 수업을 하러 나는 교실로 향해 걷고 있다. 문득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 머릴 스친다. 프러시아 진주군의 나팔 소리가 교실 창 아래에서 들려 오고, 하멜 선생이 말을 잇지 못하고 칠판으로 돌아서서 ‘프랑스 만세’ 라고 쓰던 장면이 진한 감동으로 내 가슴을 적신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복도 창가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우뚝우뚝 솟은 아파트 너머로 햇살을 받아 눈부신 북한산 백운대를  바라본다. 숱한 사람들이 밟고 할퀴어도 내색 없이 의연하다.
 교실로 들어섰다. 교사의 입실을 아랑곳하지 않는 아이들은 여전하다. 겨우 자리를 정돈 시켜 놓고 회장의 차렷 소리가 서너 번 반복되자 잠시 조용해 졌다. 이제 회장의 경례소리와 함께 저들은 다시 소란스런 작태를 반복할 게 뻔하다. 나는 잠시 조용해진 틈을 재빠르게 타서 한마디 했다. “여러분, 오늘이 선생님의 교직 생활에서 마지막 수업입니다. 이 한 시간만큼이라도 의의 있게 보냅시다." 그러고 나서 서있는 회장에게 눈길을 보냈다. 회장이 얼른 알아듣고 "경례" 했다. 마지막 수업엔 으레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말을 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말을 막 꺼내려고 하는데 이미 분위기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난장을 방불케 했다. 그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예상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인사하기 전에 마지막 수업이라 하였으니 조금은 달라지리란 기대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나의 기대는 빗나갔고 내 교직 생활의 마지막 수업은 아이들의 소음에 무참히 밟히고 말았다.
 그 시간에 내가 들려주려고 했던 이야기는, 오나라 오자서에 얽힌 일모도원의 의미였다. 일모도원, 해는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다는 뜻이다.
 나 역시 아직 할 일이 남았는데 정년에 이르렀느니 서글픈 마음을 떨칠 수 없음을 학생들에게 전하고, 힘이 넘치는 젊은 시절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뜻을 이루도록 노력하라는 말을 들려주려고 했던 것이다.
 유구무언으로 멀뚱히 교탁을 붙들고 섰다가 프러시아 병정의 나팔소리 같은 끝종 소리에 놀라 도망치듯 교실에서 빠져 나오고 말았다. 아무 인사도 없이. 하기야 며칠 뒤에 있은 졸업식 광경을 보았다면 그런 교실 모습쯤은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단상에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한창 이어지고 있는데도 아래에서는 졸업생들이 네댓 명씩 짝을 지어 돌아앉아서는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아이들이지만 졸업시켜 내보내는 담임선생의 마음은 그래도 허전하고 아쉬움으로 가득하여 졸업장과 앨범을 들려주며 뭉클한 마음을 누르느라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러나 그러한 석별의 정감도 순간, “선생님 운다, 운다.” 하는 철없는 농(弄) 소리에 교실은 웃음판이 되어 버렸고, 아이들은 역시 인사도 없이 사라져 갔다.
 이것이 우리 교육 현실의 단면이라면 모르는 남들은 믿으려고나 할까. 이렇게 된 게 누구의 탓인가를 자문해 본다. 교육자로 자처해온 내게도 잘못이 없다 못할 것이다. 마음이 무겁다. 퇴직하는 심정이 어떠냐는 주위의 질문에 할 말을 잊는다. 솔직히 말해서 시원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으나 왠지 허전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일개 평교사로서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마는 일모도원의 심정이 마음 한 구석에 남는 것은 그래도 교사로서의 한 가닥 양심일 것이다.
 가야할 길은 멀고먼데 해는 이미 저물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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