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수필] 딱 한 잔

혼자서야 그런 일이 없지만, 어쩌다 지우(知友)와 만나 술을 한잔하다 보면 어느새 자정이 넘는다. 그러면 난 스스로 죄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마음으로나마 죄인이 되었으니 응당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아내는 아내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분분히 인사를 할 뿐 누구 한 사람 나에게 벌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기가 참으로 다행이다.
만일 늦게 들어오는 나를 정말로 죄인 취급해서 현관에 세워 놓고 닦아 세우려고 한다면, 아마 난 반성하는 기색을 띠고 묵묵히 ‘고개 숙인 남자’로 서있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갑자기 대발이의 아버지가 되어, “누군 마시고 싶어 마셨는 줄 알어? 이게 다 너희를 위해서야.” 하면서 아내까지 싸잡아 너희라고 소리 지를 게 뻔하다. 그러나 이건 순전히 내 마음 속 깊숙이 감추어진 내 생각일 뿐이지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다.
어쨌거나 딱 한자의 유혹을, 정분을, 우정을, 분위기를 나는 물리칠 수가 없다. 이것은 의지의 강약이나 생활의 무절제의 유무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높고 푸른 하늘에서 솔솔 내려 부는 청량한 바람이 여민 옷깃 새로 숨어드는 늦가을, 높아져서 빈 하늘만큼이나 마음이 공허해 질 때, 혹은 비는 촉촉이 내리고 먹구름 하늘이 무겁게 짓눌러 무언지 모를 암울함을 느낄 때, 정히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하루의 격무를 끝내고 정다운 동료와 한길을 나설 때, 가로등의 희멀건 불빛 아래 버티고 선 포장마차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냥 스쳐갈 강심장이 내게는 없다.
나는 술을 좋아 하거나 사랑하지는 않는다. 내가 좋아 하는 건 분위기다. 한 잔의 술이라도 분위기가 맞지 않는 곳에선 자리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술은 분위기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술중독자가 아닌 바에야 술 자체는 알코올일 뿐 아무런 매력도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술은 대화의 매개체에 불과하다.
앞서 말한 딱 한자의 술은 촌철살인의 힘을 지녔다.
그것은 마치 덜거덕거리는 빈 펌프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하는 마중물 한 바가지와 같고, 자동차의 시동과 같다. 일단 발동이 걸리고 펌프에서 물이 쏟아지듯 정담이 무르익어 가면 마음이 부합하고 기분이 상통하여 자리를 옮겨 앉는다. 이른바 2차, 3차의 술 행각이 자정을 넘긴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죄인이 되어 아이들 앞에 선다.
그런데 묘한 건 술 마시는 버릇이다. 사람마다 얼굴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듯이 버릇 또한 같지 아니하다. 정말로 다양한 게 술버릇이다.
한 잔을 받아 놓고 노상 이야기꽃만 피우는 제사형이 있고, 술을 받자마자 잔에 입술도 대지 않고 들어붓는 하마형이 있고, 수캐 오줌 싸듯 찔끔 찔끔 꺾어 마시는 절제형도 있다.
술을 마시고 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직성이 풀리는 고성 방가형, 공연히 시비를 걸어 싸우려는 전투형, 몇 잔에 코를 고는 수면형, 으슥한 골목이면 아무데나 실례하는 방료형이 있고, 잠실 대교를 기어서 건넜다는 친구는 포복형, 집인 줄 알고 잠을 자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전화 박스였다는 친구는 노숙형이다. 모름지기 술의 청탁은 불문이로되 사람의 청탁은 필문(必問)이어야 한다.
술버릇이 고약한 친구와의 술자리는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이튿날 안부전화를 보내야 하는 이중고(二重苦)를 치루야 한다. 주량을 잊는 버릇을 가진 사람과는 부동석(不同席)이 상책이다.
술은 잘 마시면 약이 되니 약주요, 지나치면 독이 되니 독주다. 주도(酒道)를 아는 친구를 만나 흉금을 터놓고 술에 우정을 섞고 대화를 타서 시간에 버무려 마시면 그것으로 족하다. 혹자는 취하지 않을 바에야 뭘 하러 술을 마시느냐고 하지만, 혀 꼬부라진 소리로 해롱거리면서 추태를 작출하는 사람은 술을 모독하는 사람이다. 애초에 취하려고 마시지 않아도 술은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술을 권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이면 술이 나를 즐겨 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기를 당부한다.
모든 술버릇은 딱 한 잔의 술로부터 시작된다. 딱 한 잔의 술, 그것이 원수인줄 알면서도 한 잔을 마다 못하여 언제나 죄인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 나의 술버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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