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는 일이나 삶에서 회의감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릴 때가 있다. 매사가 시들해지고 내가 하는 일이, 내가 가는 길이 모두가 헛된 것 같은 상실감이 밀려올 때면 현실을 박차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한다. 그러나 일과 가족이라는 현실이 언제나 나를 묶어놓았고, 어느 날 문득 돌아보면 언제 그런 생각을 했느냐는 듯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내 할 본분을 다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며칠 전, 온 가족이 놀이터 주변에서 배드민턴을 치며 오후 시간을 보낼 때였다. 팔짝팔짝 뛰는 막내 서현이의 머리카락 너머로 보일락 말락 노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씀바귀였다. 노란 치마를 팔랑거리며 뛰노는 꼭 우리 서현이 같은 꽃이 여린 미소를 머금고 하늘거리고 있었다. 사시사철 쉴 새 없이 왁자지껄한 이 척박한 땅에다 씀바귀는 터를 잡아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맨 처음 이곳에서 씀바귀꽃을 본 것은 예닐곱 해 전 초여름이었다. 어느 날 일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놀이방에 있는 서현이를 업고 집으로 오다가 너무 지쳐 놀이터 의자에서 잠시 쉬었다. 직장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힘들다’라는 말을 일부러 하지 않을 때다. 아니 ‘나 힘들지 않아’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뇌던 시절이었다. ‘힘들다’라는 말을 하면 그 힘듦이 배로 늘어나는 것 같아 정말 의식적으로 ‘힘들다’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의자에 앉아 업었던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어느새 놀이터로 쪼르르 뛰어가더니 놀이터 귀퉁이의 단단한 땅에 피어나 하늘거리고 있는 가녀린 꽃 한 송이를 똑 따고 있었다.
한두 송이의 씀바귀는 여러 해를 보내는 동안 수없는 밟힘과 짓눌림 속에서도 스스로 터를 잡아 놀이터 주위를 온통 노란 꽃물로 물들였다. 참으로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내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날로 삶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었던 것처럼 씀바귀도 세월 따라 자기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씀바귀의 일가가 마치 내 삶인 듯하여 아릿한 정이 가슴에 솨하니 번졌다. 이 척박한 땅을 일궈 꽃을 피우고 씨를 맺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대견하고 고마웠다. 더러더러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나 힘들지 않아’를 외치며 땅을 돋워 더 깊이 뿌리를 내렸을 것이라 생각하니 나를 보는 듯도 하고 내 어머니를 보는 듯도 하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온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우리는 ‘시대를 잘못타고 나서’라는 말을 수없이 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걸어온 삶의 뒤안길을 돌아보면 어찌 깊은 회한이 없었으랴. 그렇지만 그 말 속에는 어려웠던 지난날의 그 아픔마저도 추억이 되었고, 낙심하지 않고 잘 살아온 것에 대한 어떤 자긍심 내지 뿌듯함의 징표가 배어 있었다. 그러니 너희들은 잘 다져진 땅에서 더 깊이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라는 막연하게나마 전해주는 어머니만의 사랑 표현이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의 말씀이었다. 이 좋은 세상 더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서 맘껏 포부를 펼치라는 어머니의 뜻은, 어려운 시대에도 우리는 살아왔노라 하는 간접적인 교훈의 말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내가 일과 육아라는 높다란 문턱을 가볍게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힘이었고, 세월이 주는 힘이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혼돈의 시대 크고 무서운 절망의 늪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이라는 작은 울타리였다는 말이 요즘 들어 나에게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아무런 희망의 불빛도 보이지 않던 암흑 같은 나날 속에서도 가족이 품었던 겨자씨만한 꿈은 현재의 놀라운 영향력으로 변모했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아름답다.
씀바귀는 떳떳하게 터를 잡아 일가를 이뤄놓았다. 놀이터 아이들조차 비켜갈 수 있는 그들만의 영향력을 길러낸 것이다. 혼돈의 시대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나와 또 다른 세월을 만들어낸 부모님의 세대나 놀이터 귀퉁이에 자리 잡은 씀바귀 일가나 무엇이 다르랴.
가족은 세상의 기초이다. 겨자씨만한 그 기초가 연합하여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내 방황의 시작도, 끝도 모두 가족이었다.
그것이 나의 길이란 걸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