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하며
서울북부보훈지청 이 숙 희
올해 2010년은 대한민국이 일제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경술국치의 수모를 당한지 백 년째가 되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해입니다.
일제는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3대 통감으로 임명하여 대한제국 식민지화를 단행하도록 하였습니다. 1910년 8월 16일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할 것을 독촉하였으며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었습니다.
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저항을 두려워하여 당분간 발표를 유보하였고 조약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의 조칙을 내리도록 하였습니다.
이날이 곧 경술국치(庚戌國恥)입니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게 된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기자 이를 계기로 많은 분들이 순국하였습니다. 8월의 독립운동가인 이중언선생님도 일제침략에 경고하고 단식을 결행함으로써 순절하신 분입니다.
이중언 선생님은 퇴계 12대손으로 태어나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공포하기에 항거하여 지방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일본군에게 밀려 해산하였고 해산 후 신암폭포 아래 은거하던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청참오적소-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라는 상소문을 올려 이완용 등 을사늑약 체결에 가담한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습니다.
이때 만60세를 맞은 선생은 “을사년 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오로지 한 올의 명주실과 다를 바가 없이 목숨을 영위해 온 사람이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내가 어찌 감히 살아 있는 인간으로 자처하겠는가.”고 말하고 자정(自靖)으로 일제에 항거할 것을 결심하고 조상의 사당과 부모의 묘소를 두루 찾아 그 뜻을 전하고 단식을 시작하였으며 선생이 단식을 시작한지 27일만에 순절하였습니다.
선생이 숨을 거두기에 앞서 숨을 거두기에 앞서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펼쳐보라고 가족들에게 봉서를 남겼는데. 거기에 담긴 글이 바로 경고문(警告文)입니다. ‘규범이 무너진 세상이라면 삶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성현의 가르침’이라고 밝히면서 우리 겨레가 힘써 매진할 때임을 일렀습니다. 죽음을 통해 국권 피탈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 선생의 절의는 민족적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난 100년전의 경술국치를 회고하면서 과거 역사에 대한 뼈아픈 성찰과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신념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해야 합니다. 지난 세기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치욕의 역사를 딛고 피로써 독립운동의 역사를 써가며 민족의 미래를 열어간 애국선열들의 역동적인 모습과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 민족발전의 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개항이후 경술국치를 당하기까지 우리선조들의 놓치고 말았던 여러 요소들을 꼼꼼히 뜯어보면서 다시는 그러한 과오를 되풀이 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난 역사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의 역사이고 나아가 미래의 역사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