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천의 추억

중랑천의 추억

중랑천 사랑 글짓기대회 수상작

산문부문 고등부 최우수상 

대진고등학교 2학년5반 최 도원 

 

중랑천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무료 자전거 초보자 강습생 모집’ 이라는 현수막을 보시고 바로 수강생으로 등록해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셨다. 나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어머니께서 자전거 수업을 받으러 가실 때면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 다녔다.
그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항상 “도원아 저쪽에서 자전거타고 있어 엄마는 수업받고 올께”라고 말씀하시며 수업에 열중하셨다.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히 떠오르는 것은, 큰 자전거 하나에 여러 명이 타고 함께 열심히 폐달을 밟는 모습이다. 얼마 후 어머니는 자전거로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중학생이 된 뒤에도 어머니께서는 계속 중랑천에 나가 자전거 타셨고 나도 자주 중랑천에 나가 함께 자전거를 타곤 했다.
지금은 어머니께서 회사에 다니셔서 함께 자전거 탈 기회가 없어 아쉽다. 어머니는 출퇴근을 자전거로 하신다. 매일 자전거를 타시다가 비가 오거나 날씨가 좋지 않아 자전거를 못 타시는 날이면 어머니는 “자전거를 타다 안타니까 자전거의 필요성이 절실하네…” 라고 줄곧 말씀하신다. 어머니는 그렇게 중랑천에서 자전거를 배우셨고, 자전거는 어머니의 평생 이동수단이며 출퇴근 하실 때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도 이러한 이유도 어머니가 처음 자전거를 배우던 중랑천이 마냥 고맙게 느껴진다. 또 나와 어머니의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중랑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중랑천의 고마움은 또 있다. 바로 나의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인 농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다.
비록 나는 농구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정말 좋아한다. 문제는 내가 사는 곳은 농구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농구를 하며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중랑천이다. 나와 친구들은 항상 “우리 농구하러 가자”라고 하면 으레 바로 중랑천에서 모인다.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 보면 간혹 반대쪽 코트에서 농구하던 사람들이 “한 게임 하실래요?” 라고 대결을 신청한다. 대결을 하면 번번이 지기 일쑤다. 하지만 나와 친구들은 항상 밝게 웃으며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면서 배우는 거지”라며 서로를 위로한다. 다음날이면 우리는 더욱 열심히 농구연습을 한다. 그래서인지 농구실력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중랑천은 나에게 농구의 재미와 여러 사람들과 몸으로 의사소통을 하게 해 주었다. 중랑천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다음으로 중랑천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중랑천에서 운동을 하다 여자 친구를 만났는데, 자꾸 마음이 쏠렸다. 나는 그 친구와 자주 중랑천에서 만나 운동도 하고 데이트도 즐겼다. 장미꽃이 피면 산책도 하고 둘이서 배드민턴도 치면서 우리는 친해지게 되었고, 우리의 관계는 연인이 되었다. 중랑천은 우리의 데이트 장소로 너무나 훌륭한  조건들이 많다. 여자 친구도 운동을 좋아해서 함께 운동을 하고, 서로 힘들 때 격려하고 의지가 되는 존재가 되었다. 여자 친구가 살을 뺀다할 때 나는 줄넘기의 갯수를 세어주며 그 친구를 도왔고 내가 친구와 농구를 할 때 “힘들지?”하며 나에게 음료수를 건네던 그 친구는 나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해외로 유학을 간다고 하면서 나에게서 떠나갔고 그렇게 우리는 좋은 추억과 쓰라린 마음의 상처를 가진 채 서로 서로의 일에 열중하며 살아가고 있다.
중랑천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었고 또 하나의 가슴 아픈 이별을 가르쳐 주었고 좋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중랑천은 어머니의 평생 이동수단인 자전거를 배우게 했고, 나의 운동장소이며 사교장으로 친구와 운동하고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하는 법을 알게 해주었고, 나의 소중한 사랑과 쓰라린 아픔까지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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