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수필] 그늘이 아름다운 사람들

누구나 제게 주어진 그늘이 있고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하다.
 불황과 불신의 사회적인 그늘 속에 이별로, 장애로, 질병으로 생긴 크고 작은 그늘은 자신은 물론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마저 어둡게 만든다.
 간혹, 그것을 못 견뎌 하다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불행한 이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상수리나무 숲 속의 알락그늘나비처럼 그늘무늬로 더욱 돋보이는 날개를 펼치기도 한다.
 그런 사람, 몇을 나는 알고 있다. 멀리는 애드가알렌포우와 베토벤, 그리고 고흐가 있고 가까이는 내 친구 S의 어머니와 M양, 그리고 A시인이 있다.
 골을 내도 예쁜 갓 스물의 장남을 하늘로 보낸 S의 어머니는 눈가가 마를 날이 없었다. 먼발치서 그 또래의 모습이 보이기만 해도 그는 눈물바람이었다. 한동안은 그런 그와 함께 울어주던 나와 내 친구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는 그의 울음이 두려워 그가 보이면 옆 골목으로 피해 버리곤 했다. 점점 안색이 어두워지는 그를 보면서 필경 오래지 않아 그 집 대문에 두 번째의 조등이 걸릴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구구한 예측을 뒤엎고 S의 어머니는 일어섰다.
 모내기철, 무논에 들어 선 농부가 바지자락을 걷어 올리듯 짙게 드리웠던 슬픔의 그늘을 단숨에 걷어 부치고 말이다. 그러더니 시립아동병원으로, 지체장애자의 집으로, 천사원으로 몸이 셋이어도 모자를 정도로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못 다 해 준 것들을 그 곳의 아이들에게 해 주기 위해서였을까. 그 후로는 길에서 그가 통곡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다. 어쩌다 나와 마주쳐도 눈자위만 붉힐 정도였다. 그것이 벌써 이 십 여 년 전 이야기니 그도 어느새 호호옹이 되어 있을 터이다.
 또한 그늘의 찬 기운을 마다않고 함초롬히 핀 꽃송이 같은 M양은 깊은 산속에 피는 푸른 자주 빛의 그늘돌쩌귀를 닮았다. 애잔한 자태도 그렇지만 생에 대한 강인한 의지가 꼭 그렇다. 그는 나면서부터 한 쪽다리가 짧다. 목발이 없으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한 그는 중학교만 졸업하고는 전통자수공방으로 들어갔다. 삼십 중반의 나이가 들도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수놓기에만 골몰하고 있는 그다. 수년 전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는 수틀 앞에 앉아있었다. 색실을 꿴 바늘을 손에 쥐기만 하면 그의 얼굴은 빛이 난다.
 수틀에 멘 사각의 명주 안에 온갖 좋은 것은 다 그려 넣을 수 있으니까.
천년바위 밑에 불로초나, 청송에 걸린 흰 구름이나, 부리를 맞댄 원앙 한 쌍은 시작일 뿐이다. 그의 손끝에서 한껏 피어난 연이며, 모란이며, 목련은 그 빛이며 질감이 하도 생생해서 ‘후’하고 날숨을 보내면 ‘파르르’하고 엷은 꽃잎을 차례차례 흔들 것만 같다. 그의 비범한 솜씨는 보는 이마다 탄성을 지르게 했으니 전승공예대전에서 큰 상을 여러 번 받을 만했다. 이제 오래지 않아 M은 ‘자수명장’에 올라 전통공예전수관에 자신의 방을 하나 가지게 될 것이다. 장애의 그늘을 오색실로 아름답게 수놓아 가는 그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한 번 읽어보고 단박에 좋아하게 된 어느 시인의 시와 함께 나는 아름다운 그늘을 가진 또 한 사람, A시인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산골 소년같이 순박한 웃음이 인상적인 그는 지금 투병중이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함께 그를 문병하러 갔었다. 딱히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난감한 마음으로 병실 문을 두드렸다.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우리를 맞는 그는 얼굴빛은 안돼 보였지만 웃음은 예전 그대로였다. 어서 일어나서 학교에도 다시 나가고 작품 활동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일행 중 한 사람이 말을 건네자 그는 그렇지 않아도 어제, 오늘사이에 떠오른 시상을 가지고 작품을 구상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병실의 창 너머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나직한 숲을 감싸듯이 서 있는 은사시나무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뗄 수도 놔둘 수도 없는 혹 같은 까치둥지를 하나씩 달고 있었다. 그는, 구상중인 시의 제목은 ‘까치둥지’라고 벌써 지어 놓았다며 소년처럼 웃었다. 그의 문학에 대한 열망이 곧 그의 그늘을 빈틈없는 푸른빛으로 메워 갈 것이다. 몸은 비록 병상에 뉘었지만 정신은 곧게 일어나 있는 A시인.
 문병을 간 우리가 오히려 그의 형형한 눈빛에 위로를 받고 돌아 나오던 그날, 길을 밀며 앞서 가는 아름답지도 대견하지도 않은 내 그늘. 키만 껑청한 내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내 등 뒤로 석양빛만 서늘히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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