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스여성병원 제2회 출산기 공모전 수상작
나도 엄마다
최우수상 김수정(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주공아파트)
분만 일시 : 2010년 01월 02일 AM 10시 10분, 10시 11분
성별 : 여아 쌍둥이
체중 : 채시하 1.92kg, 채송하 2.36kg
2006년 11월 결혼을 했다. 남편과 나, 둘 다 건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획하기만 하면 바로 임신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임신 실패에 난 너무 힘들었고 결국엔 병원을 찾았다. 세 번의 인공수정도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나의 몸과 마음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불임전문 병원을 권유받았다. 신설동 불임전문병원을 찾았다. 그때 내 나이 서른넷. 의사선생님은 나이가 있어 인공수정을 해보고 안 되면 바로 시험관을 하자고 하셨다. 4번째 인공수정이 실패하자 시험관을 준비했다. 말로만 듣던 시험관을 내가 하게 된다는 생각에 무섭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고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매일 같은 시간에 배에 주사를 꽂고 엉덩이에 주사를 맞아야 했다. 나중에는 간호사 언니가 주사를 놓을 때 안쓰러워 할 정도로 내 엉덩이는 피멍이 들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참을 수 있었다. 아니 참아야만 했다. 나도 엄마가 되고 싶었으니까...
너무도 간절히 그렇게 힘겨운 시간을 버티고 견뎌, 난 정말 거짓말처럼 쌍둥이를 임심했다. 그것도 시험관 한번 만에. 착상이 완전하게 되고 아기집이 확실하게 보일 때 쯤 의사선생님께서 이젠 일반병원을 다녀도 된다고 하셨다. 담당 의사선생님에게 산부인과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바로 장스여성병원 이인식 선생님을 추천해 주셨다. 망설임도 없이 바로 장스여성병원에 갔다. 워낙 인지도가 높고, 평이 좋은 병원이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인식 선생님께 처음으로 진료 받던 날, 진료 소견서를 보시더니 “음... 시험관 한 번에 됐네? 그럼 그건 고생한 것도 아니야. 쌍둥이 임신하면 남들보다 두 배로 힘들테니까 각오하고 우리 잘해 보자구요”
쌍둥이들이 뱃속에서 잘 자라주어 막달이 다 되었다. 출산예정일은 2010년 1월 11일. 하지만 쌍둥이인지라 이인식 선생님은 수술날짜를 1월 2일로 잡아주셨다. 마지막 진료를 보고 9시 10분 수술실로 향했다. 워낙 겁이 많은 터라 수술대에 올라가는 순간부터 내 심장은 밖으로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마취를 해야 하는데 혈압이 160, 170 계속 올라갔다. 마취과 선생님께서 덜덜 떠는 내 손을 꼭 잡아주시면서 “엄마가 이렇게 계속 불안해서 떨면, 뱃속 아가들도 안정을 못 찾고 불안해해요. 그냥 깊은 잠 잠깐 자고 나면 예쁜 아가들 본다는 생각만 해요. 다 잘 될거예요” 그 말은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무섭고, 불안한 나에게 너무나도 큰 위로의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감사하다.
아침 9시 10분에 수술에 들어가 10시 10분에 선둥이, 10시 11분에 후둥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 다음에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이인식 선생님은 “배를 열었을 때 이미 뱃속에 출혈이 너무 심했고. 그래서 쌍둥이 꺼내고 남편을 불러 출혈이 너무 심해 수혈을 했다”고 한다. 이미 너무 많은 출혈로 오른쪽 나팔관과 난소는 쓸모가 없는 상태까지 가서 바로 절제술을 하고, 출혈을 잡아 수술을 마친 것이다. 출혈 원인은 자궁이 커지면서 배와 자궁 사이에 있는 혈관이 터지면서 생긴 것이고, 협착까지 왔다고 했다. 너무 아파서 이틀 동안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가스가 나오기 전까진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 갈라져 남편이 거즈에 물을 적셔 입술에 대주었다. 난 몰래 그 거즈에 있는 물을 빨아 먹었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겨운 일이다.
우리 쌍둥이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좀 작게 태어났다. 선둥이는 1.92kg, 후둥이는 2.36kg 한 바구니에 같이 있는데 너무나 작아 인형 같았다. 몸무게는 작았지만 미숙아는 아니기에 인큐베이터에도 안 들어가고 보통 신생아처럼 잘 지냈다. 난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리 쌍둥이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눈으로만 보는데도 정말 내가 엄마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나도 우리아가들에게 모유를 주고 싶었다. 수술한지 3일째 되는 날, 정말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참고 가까스로 일어나 신생아실로 갔다. 하지만 아픈 몸에 그것도 번갈아 가며 두 녀석에게 젖을 물리는 일이란 쉬운 게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참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아가들이 저체중이라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수간호사언니는 두 녀석이 체중만 작지 목소리는 신생아실에서 제일 크고, 배고프면 얼마나 크게 우는지 신생아실이 쩌렁쩌렁 울린다고 했다. 젖병도 쪽쪽 빨면서 아주 잘 먹고 아주 건강하다고 했다.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너무 긴장하고 걱정했던 나의 얼었던 몸이 쌓인 눈 녹듯 사르르 녹아버렸다.
퇴원 예정일을 3일 넘겨 우리는 드디어 병원문을 나설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을 축하라도 하는 듯 밖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아직은 너무도 서툴고, 많이 모자라는 초보 엄마지만 최대한의 노력과 사랑으로 우리 쌍둥이를 잘 키우겠노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쌍둥이들이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신 이인식 선생님과 세심한 배려로 신경써 주신 장중환 선생님, 신생아실 간호사언니 등 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퇴원하기 전날 아침에 피검사를 했다. 수혈받은 피가 내 몸속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지를 검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체혈 후 2시간 정도 지나 장중환 선생님께서 오셨다. 고생했고 쌍둥이를 출산해 축하한다고 해주셨다. 그리고 한쪽 나팔관과 난소 없어도 사는데 큰 불편한 것이 없으니 너무 맘 상해하지 말라면서 위로까지 해주셨다.
그런데 문제는 피검사 결과 염증수치가 너무 높게 나왔다고 하셨다. 다음날도 피검사를 했지만 염증 수치는 또 떨어지질 않아 하루 더 있어야 했다. 장중환 선생님은 내가 안쓰러웠는지 남편에게 번데기나 닭백숙이 좋다고 하시면서 그걸 사다가 주라고 하셨다. 남편은 당장 닭백숙은 구하기 힘들어 시장 구석구석 뒤져서 번데기를 한아름(?) 사왔다. 다음 날 아침 장중환 선생님이 병실에 들어왔다. 나는 선생님 얼굴을 먼저 봤다. 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젠 그만 집에 가도 되겠어요. 축하해요! 염증수치 정상이니 쌍둥이 데리고 집으로 가세요” “선생님 감사합니다”를 연거푸 하며 남편과 나는 싱글벙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