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스여성병원 제2회 출산기 공모전 수상작
우수상 정성실(서울시 중랑구 면목본동 96-43)
분만 일시 : 2011년 08월 11일 오전 10시 56분
성별 : 남(김영진)
체중 : 3.24kg
영원히 기억될 행복한 순간
이른 새벽. 화장실에 갔다가 속옷에 비친 이슬을 보았다. 저번 주 장스여성병원 산부인과 진료 때, 담당의사인 이인식 원장님께서 목요일에 입원해서 유도분만을 하자고 하셨다. 하지만, 출산이 임박한 시기이므로 이슬이 비치거나, 양수가 터지거나, 배가 아픈 징후가 보이면 병원으로 바로 오라고 하셨다. 어느새 일어난 남편은 긴장된 표정이었다. “왜? 병원 가야 될 거 같아?!” “응, 원장님이 이슬이 비치면 병원으로 오라고 하셨어. 근데, 오늘 이인식 원장님이 휴진이셔서... 내일 갈까?” “일단 가자. 별거 아니면 다시 집으로 오면 되니까.”
진료 올 때마다 봐서 익숙한 외래 간호사 선생님이 이전과는 다른 질문을 하셨다. 가족분만실, 병실, 식사 등을 어떻게 할 건지에 대한 낯선 결정을 해야 했다. 내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남편이 가족분만실 사용과 미역국이 포함된 특식을 선택했다. 하지만, 병실은 결정 못하는 듯 했다. 우리는 둘이 알뜰히 저축해서 결혼을 한 지라 경제형편이 그렇게 풍족하지 않았다. 적은 액수라도 경제적인 사항은 항상 둘이 상의해서 결정했다. 난 무의식적으로 통장잔고를 떠올렸다. 다인실을 가고 싶었지만, 남편이 속상해 할까봐 2인실을 선택했다.(하지만, 후에 남편은 1인실로 바꿔 놓았다.)
설렜다. 앞으로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내 보호자는 남편이다. 친정엄마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날 간호해 줄 수 없다. 조카가 가와사키 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조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친정엄마는 병원에서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가와사키병은 소아에게 발생하는 원인 불명의 급성 열성 혈관염으로, 전신에 다양하게 침범한다.) 다른 산모들을 친정 엄마가 간호도 해주고 옆에서 챙겨주고 하는 모습을 보니 부럽기도 했지만, 내 곁에 언제나 친구처럼 세심하게 챙겨주는 남편이 병원에 함께 있어서 든든했다.
이윽고 진통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어서 분만대기실에 누웠다. 엄마 생각이 났다. 우리 삼남매를 낳으셨다고 생각하니 상상이 안 되어졌다. 엄마와 아빠는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셨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정말 열심히 일하셨다. 엄마는 낮에 일하시고 저녁에 병원에 찾아가셔서 나를 낳으셨다고 한다. 지금 내가 겪는 이 진통을 겪으면서도 장사를 다 하셨다니 정말 대단하다. 엄마를 떠올리며 참아보려 했지만, 진통은 그런 나의 의지를 개의치 않고 엄습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몸에 열이 났다. 며칠 전부터 코가 좀 맹맹하고, 가래가 있었다. 몸살 조짐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던 것이 문제가 됐다. 시간은 자정을 넘기면서 내 몸에 열이 조금씩 나기 시작하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 전체가 으슬으슬 떨리면서 열은 떨어질 줄 모르고 계속 지속 되어졌다. 열이 계속 오르면서 아기의 심장박동수도 정상을 벗어나 계속 빨라지고 있었다. 이대로 상태가 계속 안 좋아지면 아기가 위험해 질 수 있기 때문에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하셨다. ‘자연분만을 하려고 14시간째 이러고 있는데, 제왕절개라니...’
억울했다. 다음 경과를 지켜본 후 결정을 하겠다고 하시면서 당직 의사선생님이 나가셨다. 난 몸살기를 알면서도 조기에 병원을 찾지 않은 것을 속상해 했고, 남편은 괜찮아 질 거라며 애써 태연한척 하고 있었다. 아기를 가지면 감기약을 먹으면 안 되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태아가 어느 정도 크면 먹어도 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아기를 낳으려고 와서 말이다.
당직 간호사 선생님과 남편의 정성으로 서서히 체온이 떨어져 갔다. 경과를 지켜보러온 당직 의사선생님이 태아의 심장박동 상태가 정상적으로 돌아와서 수술은 안 해도 될 거 같다고 하셨다.
너무 기뻤다. 몸은 아팠지만, 그 고통이 잊혀 질 정도로 마음이 놓였다. 남편과 난, 밤새 간호해주신 그 간호사 선생님이 너무 고마웠다. 그 분이 아니셨으면 어떻게 됐었을까? 지금도 가끔 생각하면 아찔하다. 너무 아팠다. 다시 무통주사를 맞았지만 그래도 계속 아팠다. 더 이상 참지 못할 정도였다. “자기야, 나 그냥 수술할래. 너무 아파서 안 되겠어.” “그래. 고생했어. 원장님이 다음에 오시면 그 때 말하자.” “응. 나 그냥 낳으려고 했는데, 너무 아파. 아...” 난 입 밖으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참으려고 하는데 안 되었다. 여태까지 느꼈던 통증은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간호차장님이 들어오셔서 내진을 하셨다. “엄마! 곧 아기 나와요. 정신 차려야 돼!”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너무나 아파서 정신도 혼미했다. 수술하려고 생각할 정도로 아픔이 찾아 왔었는데, 그 아픔은 우리 아기가 나오기 위한 것이었다.
“엄마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요. 정신 차려요.” 분만은 시작되었고 난 간호차장님이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있는 힘껏 분만에 힘쓰고 있었다. 드디어 장장 26시간 진통의 마지막 종지부를 찍고 있는 순간이었다. 너무나도 순식간이었다. 아기가 태어났다. 진통은 그렇게 극심했건만, 낳는 건 찰나였다. 분만은 약10분 정도 걸린 것 같았다. 남편이 들어와서 아기 탯줄을 자르고, 휴대폰으로 아기 사진을 찍었다. 간호차장님께서 오랜 진통 끝에 낳은 아기를 내게 보여주셨다. “아기랑 엄마랑 코가 똑같이 생겼네. 고생했어요.”
난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내 자신이 너무 대견스러웠다. 그리고 아기를 보니 제왕절개수술을 하려고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26시간 동안의 진통을 견뎌내고 자연분만에 성공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 아기도 그 시간동안 나와 함께 견뎌주어서 너무나 고마웠다. 자그마한 머리에 길쭉한 몸을 가진 사내아이였다. 입이 작은 게 남편을 닮은 듯 했다. 초음파 사진으로만 보다가 이렇게 실제로 보니 눈물이 났다. ‘내가 이 아기를 낳았다.’
정말 철부지 같았던 내가 엄마가 되었다. 우리 아기의 부모가 되었다. 건강한 아기를 보니 26시간의 진통을 겪은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우리 부부에게는 최고의 선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