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스소아청소년과 제2회 육아수기 공모전 수상작
지호랑 연호랑, 함께여서 아름다운 시간의 기록들
우수상 한진미
망우동 435-14번지 1층
분만 일시 2012년 3월 1일 새벽 2시 여(정연호) 3.4kg |
2012년 3월 1일. 축복이가 태어났다. 새벽 2시 정각. 3.12kg, 51cm, 여자아이. 너무나 작은 몸.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를 확인했다. 두 번째여서인지 조금은 맘이 평온했다. 주님께 감사, 또 감사드리며. 통증 때문에 밤을 꼬박 새우고도, 아기가 보고 싶었다.
3월 3일. 첫째 지호가 유난히 큰 아이처럼 보이는 요즘, 너무 미안해서 아이를 바라보다 코가 시큰해졌다. 요즘 부쩍 사내아이다워진, 장난꾸러기 녀석이 동생이 태어나고 이것저것 제재 당하는 일이 많아졌다. 할머니께, 엄마 아빠에게 너무하다고, 같이 재미있게 놀려고 했다는 말에 마음이 찡... 잠든 아이 곁에 누워 등을 다독이면서 미안해, 하고 말하면 뜨거워지는 눈가. 모든 게 곧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지호가 외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 아빠가 저를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사실을 꼭 알아주었으면.
3월 5일. 축복이 병원 검진 날. 뒤꿈치에 바늘을 찔러 피를 내는 데도 앵, 하고 그뿐이다. 지호처럼 순한 녀석. 혈액형은 O형. 남매가 똑같다. 설사기가 있어서 약 처방을 받았다. 지호는 입학식을 했다. 원복을 입고 등원하는 모습이 제법 늠름했다. 그래도 아직은 39개월, 세 돌 박이인데. 아이를 억지로 유치원으로 밀어낸 듯한 맘에 속이 상했다.
3월 10일. 태어난 지 열흘, 축복이 탯줄이 떨어졌다! 누구 배꼽을 닮았을까. 아무튼, 이젠 좀 목욕이 편해지겠다. 엄마와 연결되었던 끈이 깨끗이 떨어짐과 동시에 이 아이가 나와 온전히 독립되었음을, 알겠다. 아이는 나의 소속이 아니다. 함께, 나란히, 손을 잡고 가는 것이다.
4월 20일. 신랑이 일을 그만두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쓸쓸할지 알기에 더 속이 상했다. 나는 그의 삶을 결정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삶을 동행하는 아내다.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 좋겠다.
5월 23일. 신랑의 서른한 번째 생일. 올해도 나는 신랑의 생일상을 챙겨주지 못했다. 어제는 어머님이 갖가지 음식을 해오셨고, 오늘은 엄마가 생일 케이크를 사다주셨다. 28일이 생일인 나도 미리 당겨 축하를 받았다. 부모님이 계신 것이 감사하게 느껴지는 하루하루다. 그것을 모르고 산 시간이 너무나 안타까울 정도로.
5월 24일. 마음이 몹시도 추운 날. 새삼 두 아이의 엄마라는 현실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신랑이 외출을 하고, 두 아이와 씨름했던, 고 몇 시간이 버거워 이렇게 자책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 날 믿고 세상에 와준 아이들... 그들과 맞바꾼 것은... 나의... 무엇일까... 큰 아이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서 괴롭다. 녀석이 혼자 잠들어 있는 것이 괴롭고, 읽어주지 못한 책들이 괴롭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이 현실이 괴롭다.
어느 출판사에 글작가를 지원했다 낙방했다. 메일로 두 번 이야기한 게 전부였는데, 얼굴을 본 적 없는 누군가가 나를 다 파악했다는 양 말했다는 것이 괴롭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아이들 사이에서 잠들고 일어나는 것. 작은아이 우유 먹이고, 큰아이 유치원 보내고, 밥을 먹고 청소하고... 그것들을 또 다시 반복하는 것. 그 시간들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가 흐릿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슬프다. 이런 감정이 아이들에게 빚이 될 감정임을 알면서도, 그것들이 내 앞을 가로막고 뒤흔드는 일을 피할 수가 없다. 남편의 늦은 귀가가 부럽고 서럽다. 아이들의 잠든 얼굴이 슬프다. 미안하다.
6월 9일 연호의 100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백설기와 수수팥떡을 준비하고 토마토, 수박, 바나나로 상을 차렸다. 생각보다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아 난감했지만 엄마가 음식의 대부분을 준비해 주셔서 어머님, 아버님도 모시고 조촐하게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다. 도무지 갈 것 같지 않았던 시간. 그래도 가긴 가는구나. 늘 지금처럼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주길. 사랑하는 연호. 그리고 지호.
7월 23일. 생리주기 때문일까. 마음이 계속 우울하다. 부지런히 움직이던 몸은 더뎌지고 계속 피곤하고 잠이 쏟아진다. 남편의 늦은 퇴근이 당연하면서도 서럽고, 먹는 것은 내 안에서 자꾸만 탈을 일으켜 몸을 지키게 한다. 못 먹으니 더 지치는 지도 모르지만, 이 더위 속에서 음식은 나를 미치게 한다. 아니 미쳤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작은아이와 큰아이를 홀로 돌본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마음과 몸이 자꾸만 서럽다 한다. 키울 자격도 없는 내가 아이들을 낳은 것인가 싶어 녀석들 앞에 무릎이 꺾인다. 죄를 지은 것 같다.
더위 때문일까. 넘어진 마음이 일어설 줄을 모른다. 좁은 집이 원망스럽다. 주인집 화단에 뿌려진 거름 냄새가 창을 타고 넘어오는 것이 못마땅하다. 심사가 뒤틀리니 가서 시비라고 붙고 싶다. TV를 보며 “나도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 지호에게 “그럼 가서 살아” 하고 짜증스럽게 답했다. 지호는 TV 앞을 서성이더니 들어갈 수 없다고 이야기 했다. 나쁜 감정들이 곳곳에 웅덩이를 만든다. 내 발이 푹푹 빠져 나올 줄을 모른다.
9월 16일. 연호가 200일이 되었다. 열심히 기어 다니며 이곳저곳을 탐색한다. 지호와 하는 쌀보리 게임을 너무나 즐거워한다. 깔깔깔 웃음소리가 절로 난다. 지호는 의젓하게 이런저런 말을 하면 곧잘 들어준다.
지난 번 친구의 결혼식 날, 대학 졸업 후 처음 만났던 01학번 선배가 내게 말했었다. “그래도 꿈은 잃지마.” 그 말이 왜 그렇게 슬펐었는지. 나는 내 꿈도 아이들을 위해 이미 놓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다시 생각해본다. 나의 꿈, 나의 삶을. 아이들 속에서 치이고 볶이며 웃고 울면서도 그 속에서 한 번 꿈을 꾸어보려 한다. 비가 내린다. 내가 좋아했던 빗소리. 다시 설레는 마음.
10월 18일. 정연호 232일째, 이를 악물고 이름을 천천히 적어본다. 정.연.호. 녀석의 기동성이 점점, 활동량이 장난이 아니다. 이제는 아무거나 붙잡고 선다. 오빠 밀치기, 잡아당기기는 기본 오빠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뺏기도 한다.
10월 27일. 요 며칠 육아일기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연호를 낳고 쓰기 시작한 일기들을 옮겨 적었다. 처음엔 오래 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제 일기장은 나를 위로하고, 내 시간을 기억하게 하는 소중한 자리가 되었다. 몸이 지칠 때 쓰고, 기억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쓰고, 아이들에 치여 힘들 때 꺼내 읽었던. 아이들에게 주고픈 마음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다시 읽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잘못한 일들만 생각나 눈가가 뜨겁다. 지나오고 나면 숨 돌릴 틈 없이 또, 해야 할 일들과 신경 써야 할 일들은 내 앞에 있지만 두려우면서도 맞서려는 건 나를 믿고 이 세상에 와준 아이들이 있기에. 적어도 용기 있는, 씩씩한 엄마가 되고 싶기 때문에. 부지런해야 꿈도 꿀 수 있다고 했다. 시간과 여건을 탓하지 않고 내 이름도 잊지 않으며 지호와 연호 엄마로 살아야지. 힘든 시간이든 행복한 시간이든 어쨌든 지나가니까,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기로 했던 다짐도 잊지 않으면서. 지금을 최선을 다해 살고 싶다. 그러면서 불쑥, 훗날 아이들이 이런 내 맘을 알아줄까 생각해본다. 괜한 욕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울고 웃고, 희망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가, 하는. 지나고 나서야 그 때가 행복임을 아는 것. 그러기 전에 그 속에서 행복을 누리고 픈. 그것이 삶의 소중함이라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는, 지금의 나는, 두 아이, 지호와 연호의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