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조상 때부터 인간들은 신의 경계를 넘나드는 낙원을 찾아 꿈을 꾸며 세월을 낚고 있다.
고통 없이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땅, 죽음 없이 영원한 삶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별천지는 어디에 있을까? 무지개 너머에 있을까?
세조는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면 편한 잠을 잘 것 같았다. 그리고 더 이상 단종복위운동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단종의 시신을 왕위에 앉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제부터 나의 왕권을 단단히 쌓아올리면 되는 거야.’
그는 탄탄대로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민심은 세조의 생각과 다르게 어수선했다. 단종을 첩첩산중 영월에서 무참히 죽인 세조에 대한 반감은 일파만파 거칠게 퍼져 나갔다.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지글지글 타오르며 꺼질 줄 모르는 기름처럼 백성들의 분노는 살기가 돌았다.
‘이제껏 명분 없는 살육을 내가 하였단 말인가? 뼈가 부서져도 결코 무릎을 꿇지 않고, 저승길을 택한 단종의 충신들 같은 인사는 정녕 내게 없다는 말인가? 왕조의 앞날은 어찌 될까?’
공신의 탈을 쓰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생각하면 세조의 마음은 허탈하였다.
세조는 마음을 달래려고 왕세자와 함께 비원(秘苑)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였다. 단종의 어머니(문종의 비, 현덕왕후) 권씨가 소복을 하고 앞길을 막아서고 있는 게 아닌가! 세조는 오싹함을 느끼고, 그 자리에 장승처럼 서서 꼼짝하지 못했다.
“내 어린 아들 단종을 죽인 원수야! 어디, 네 아들도 죽어봐랏!”
권씨가 머리를 산발한 채 두 손을 갈퀴처럼 내밀고 달려들었다. 세조는 숨이 턱 막히도록 놀라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권씨는 혼비백산한 세조를 밀치고 세자에게 달려들더니 목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아악! 사람 살렷! 아버지, 저를 살려주세요!”
세자가 비명을 질렀다.
“귀신아, 세자에게서 물러나거라. 내관, 어디 있느냐? 당장 귀신의 목을 쳐랏!”
세조가 소스라치게 놀라 내관을 불렀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꿈이었다. 그러나 꿈치고는 너무나 생생했다. 중병을 앓은 듯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요상한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세조가 꿈을 꾼 이튿날부터 세자가 시름시름 앓는 것이었다. 세자에게도 매일 밤 단종의 어머니 권씨 혼령이 찾아들었다.
세조는 21명의 승려를 궁궐로 불러들여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드렸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세자는 단종이 죽은 그 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바로 의경세자인데, 20세였다.
세상 사람들은 슬퍼하기는커녕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죗값이라며 고소해 하였다. 그리고 권씨의 원한 맺힌 살을 맞은 것이라고 믿었다.
세조는 분통이 터져 참을 수가 없었다.
“여봐라! 권씨의 무덤을 파헤쳐라! 백골일지라도 토막을 내어 강물 속으로 처넣어라!”
단종의 어머니이고, 자신의 형수이기도 한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까지 범했다.
의경세자를 통해 왕권을 굳건히 하려던 욕심이 물거품이 된 세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날 밤, 권씨의 혼령이 다시 나타나 두 눈을 부릅뜨고 세조에게 침을 뱉었다. 그 꿈을 꾼 다음날, 세조는 피부에 반점이 흉측하게 돋았다. 그리고 평생을 피부병에 시달렸다.
이후부터 세조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가차없이 처벌했다.
백성들은 입과 귀를 막고 살아야 했다. 힘없는 백성들은 새로운 나라, 자유와 평화가 있는 세상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먼 옛날 백제의 발상지이며 첫 도읍지였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은 중랑천 일대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차산 동봉에 백제 시대의 토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면목동, 중곡동 일대가 도읍지였을 것이다.
중랑일대는 살기 좋은 지역이었다. 중랑천에는 물고기와 게가 풍족하였고, 아차산·용마산·망우산에는 봄나물이 지천이었다. 배와 대추, 밤 같은 과실들은 토양이 비옥하여 쑥쑥 잘 자랐고, 수확 또한 많았다. 땅은 기름지고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용마산의 꿩은 사냥하기에 알맞았고, 묵동에서 나는 숫돌은 일품이었다. 봉화산 소나무 참숯으로 만든 먹은 품질이 우수하여 궁중에까지 진상하였다. 그리고 면목동의 너른 들판은 말을 기르고 훈련함에 더 이상 좋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해도 빈부의 차별은 엄연하였고, 신분의 귀하고 천함도 그대로였다.
용마산 밑자락 외딴집에서 돌밭을 일구고 사는 가난한 농부 내외가 있었다.
착하고 부지런한 농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해마다 애를 낳아 보통 7~8명을 거두는 집들을 부러워하며, 농부 내외는 해만 지면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밤새도록 정성껏 애써도 도통 아기는 들어서질 않는 것이었다. 뭘 먹으면 좋다더라, 합궁하기 좋은 날을 잡으라는 둥 많은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따랐지만 모두 헛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낮동안 돌밭을 일구고, 이불 속 밤일까지 치른 농부 내외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달빛이 교교하게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부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때 달빛을 따라 노인이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수염을 배꼽 아래까지 늘어뜨린 백발노인이 큰소리로 부인을 깨웠다.
“어서 일어나거라! 부부의 정성이 갸륵하여 소원을 들어주려고 내가 왔느니라. 당장 이 길로 양원수를 떠오너라. 그리고 금식하면서 3일 밤낮 용마산 바위를 보고 치성을 드리거라. 그리하면 아기가 들어설 것이다. 태어날 아기는 용마산의 정기를 받아 힘세고 명민하여, 도탄에 빠진 이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것이다.”
백발노인의 말을 듣고 있던 부인은 머리를 방바닥에 처박고 벌벌 떨기만 했다.
“단, 조건이 있느니라. 아기가 7살이 될 때까지는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고 키워야 한다. 이를 꼭 지켜야만 아기도 살고, 나라도 구할 수 있느니라! 이 말을 명심하라! 절대로 명심해야 하느니라~.”
말을 끝내고는 백발노인이 사라졌다.
부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시처럼 생생하였다.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았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길을 나섰다. 칠흑 같은 길을 달빛이 타박타박 따라오고 있었다.
양원수가 있는 우물을 가려면 십 리는 족히 되었다. 발걸음을 빨리하여도 아낙네 걸음은 느리기만 하였다.
이따금 별을 따러 나선 삽사리 짖는 소리만이 애처롭게 밤하늘을 수놓았다. 달빛을 머금은 배꽃이 화등잔을 켜놓고 있었다. 탐스럽고 요염하였다.
망우고개 쪽으로 들어서자, 저만치 희끄무레한 물체가 어른거렸다. 부인은 머리칼이 바짝 곤두서면서 겁이 났다.
‘아이고, 무서워라! 귀신일까?’
가만히 살펴보니 귀신은 아닌 것 같았다.
자기처럼 물동이를 이고 오는 부인네였다. 서로 마주 본 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말을 건넸다.
“이 밤에 어찌 이런 우연이……. 대체 어디서 오는 뉘시오?”
“난 먹골에 살고 있어요. 여기 양원수로 치성을 드리면 아기가 들어선다기에 봉화산 둘레길을 돌아왔지요.”
“그래요? 나도 치성드리려고 양원수를 뜨러 가는 길이에요.”
“동무 삼아 밤길을 걷게 되어 다행이군요.”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망우고개 밑에 있는 양원리로 들어섰다.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왕릉지를 정하고 돌아오던 길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양원리에 있는 돌로 쌓은 샘물이다. 그 물맛이 어찌나 좋았던지 몇 번이나 떠오게 해서 마시고는,‘양원수’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양원수는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변함없이 늘 그대로 물이 솟아올라 인근 사람들까지 요긴하게 쓰곤 하였다.
두 사람은 양원수를 항아리에 찰랑찰랑하게 퍼담고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부인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농부는 마당에 자리를 폈다. 양원수를 정화수로 삼고 구불구불 절을 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용마산 바위처럼 우직한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신령님께 비나이다.”
농부 내외는 백발노인이 시키는 대로 3일 밤낮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정성껏 치성을 드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지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더니, 농부 아내의 배가 불러오는 것이었다. 농부의 집은 이웃들과 멀리 떨어져 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을 속이기는 어렵지 않았다.
어느덧 열 달이 되었다. 산고 끝에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유달리 우렁찼다.
“오호라! 천하를 호령하고도 남을 장군감이구먼!”
농부 내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이가 돋고, 다음날부터 기어다녔다. 농부 내외는 백발노인의 말대로 큰 인물이 태어났다고 믿었다.
“여보, 어떡하지요? 아기를 어떻게 숨겨 기르지요?”
“그러게 말이야. 밭에 나가 김매기도 해야 하고……. 보통 갓난아이와 다르게 우리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니 좋긴 한데…….”
농부 내외는 아기가 태어난 기쁨도 잠시였다. 근심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집에만 있으니 먹을 것도 떨어지고, 걱정이에요.”
부인의 근심에 농부는 마음을 다잡았다.
“먹고 살아야 아기도 키울 수 있으니, 문을 밖으로 잠그고 일하러 나갑시다.”
농부 내외는 밭에 나가 서둘러 김을 매고, 점심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산과 들을 헤집고 찾아도 아기는 보이지 않았다. 아기를 찾지도 못하고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깜짝 놀랐다. 아기가 방에서 천연덕스럽게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부인, 참으로 괴이한 일이오. 어딜 쏘다녔을까?”
“그러게요. 이 아이가 장차 어떻게 클지 두려워요.”
말도 못하는 아기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농부 내외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 후에도 부부는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밭일을 다녔다. 날이 갈수록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컸다. 곧잘 말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