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 걷힌 날
안 재 식(小亭 安在植)
황사가 극성이다. 올해는 더 심할 모양이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니 뿌옇다 못해 노랗다. 목까지 컬컬하여 냉수를 마셔본다. 옛날 먹던 물맛은 달착지근했었는데, 요즈음은 입맛도 변했는지 약간 비릿한 느낌이 들어 기분을 언짢게 한다.
텔레비전에서는 꽃놀이가 한창이다. 검버섯 투성이라 놀림받던 백목련이 자궁을 벌리고, 덩달아 늙은 매화도 붉디붉은 향기를 내뿜는 계절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멍하니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달력을 바꾼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꽃피는 계절이 왔으니 세월 참 빠르다.
문득 친구 생각이 났다. 봄이 오면 꽃놀이 한번 가자던 친구에게 손전화를 돌렸다. 엉뚱한 이가 나와 대뜸 화부터 낸다. 집으로 전화를 하니, 없는 번호란다. 여기저기 수소문해도 감감하다.
친구가 자주 들른다던 포장마차를 찾아 나섰다. 혹시나 해서 들른 포장마차에 혼자 앉아 소주를 먹고 있으니, 오늘따라 먼 이방에 온 듯 낯이 설다.
지난겨울이었다. 찬바람이 맵던 날, 친구와 둘이 얼근하게 취한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는, 평생 돈벌이기계로 살아왔는데 가정에서 인정을 못 받는다고 푸념했다. 친구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적에는, 한땀 한땀 정성들여 덧기운 조각보에 덮인 밥상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쳤어도 아랫목에 누우면 피로가 싹 가셨다고 자못 감상적으로 얘기하다가 제 설움에 겨워 울먹이기까지 했던 친구의 목소리가 그리움을 물고 귓전을 울린다. 그날 친구와의 약속이 꽃놀이 한번 갔다 오자는 거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라본 도시의 불빛이 휘황했다. 온 세상 집들이 거리로 나앉아 가정을 내몰고 기다리는 이 없는 세상, 지친 몸 드러눕던 안방들은 어디에서 떠돌까. 친구 생각에 울컥 서글픔이 몰려온다.
맘만 먹으면 꽃놀이쯤은 언제든 다녀올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친구나 나로서는 특별한 계획이었고, 약속이었다. 그만큼 친구나 나는, 앞만 보고 달려온 측은한 인생이었다. 악착스럽고 각박하게 살았던 것이다.
지나온 삶을 반추하며, 옛 조상들의 지혜를 더듬어본다.
위화도 회군으로 역성혁명에 성공한 조선왕조 태종 이방원의 공신 중 문신으로는 하륜(河崙)이 있고, 대표적인 무인으로는 이숙번이 있다. 조선의 제갈공명이라 불리었던 하륜이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인생여조로(人生如朝露)」이고,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 「인생무상 제행무상(人生無常 諸行無常)」이다.
인생여조로란, 아침 햇살이 비치면 순식간에 스러져 버리는 이슬과 같은 것이 인생이라며,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또 제행무상이란, 우주 만물은 항상 돌고 변하여 잠시도 한 모양으로 머무르지 않음을 일컫는 말이다.
마침 이숙번의 집에서 술잔을 나누던 태종이 하륜의 임종 소식을 듣고 황급히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숙번은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는 말을 남겼다.
개혁의 깃발 아래 혁명의 와중(渦中)에서 끝없이 피를 부른 전리품으로 얻어진 권세와 재물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던 그들이 인생의 덧없음과 권세의 무상함을 설파한 것은, 6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큰 것이다.
요즘처럼 뉴스 듣기가 겁이 날 때도 드물다. 백성들을 잘 살게 만들어 줄 책임이 있는 지도자 집단인 입법, 사법, 행정, 언론,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진실성과 도덕성이 최우선인 학자, 성직자, 선생님들까지도 모두가 썩을 대로 썩었다고 아우성이다.
내가 속한 문단도 예외가 아니다. 선비정신은 사전에만 있을 뿐이다. 기성 정치인 뺨칠 정도로 권모술수와 모략이 판을 치고, 얄팍한 해바라기 근성으로 태도를 돌변하며 양심을 팔고 있다.
모두 제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진실 게임을 즐기고 있다. 이런 세태에서 고지식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사람은 5주일 이상 음식을 먹지 않으면 굶어 죽고, 5일 이상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말라 죽고, 5분 이상 공기로 숨 쉬지 않으면 기막혀 죽는다.
그래서인지 기막혀 죽지 않으려고, 기죽지 않고 살려고 너도나도 황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의 시녀가 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허망한 일인 줄도 모르고, 혼자 잘 살려고 발버둥친다.
사람이 죽어서 화장장을 가면 섭씨 2,000도의 고온에 15분이면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만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망자가 입는 수의(壽衣)에 주머니를 달지 않았다. 등기문서를 갖고 가도 소용없는 일이고, 손전화를 갖고 간들 전화 한 통 받을 수 없다. 더욱이 권력과 황금을 갖고 간들 무엇에 쓰랴. 인생이란, 아침 햇살에 스러지는 이슬과 같은 존재인 것을…….
어느 신부가 강론 중에, 여러분 중 천당에 가고 싶은 사람 있느냐고 물으니, 모두가 가고 싶다고 하여, 그럼 지금 당장 같이 가자고 하였더니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더란다. 그 말을 듣고 한참 웃은 일이 있다. 결국 천당보다 좋은 것이 현재의 삶인 것이다.
인생이란 결국 별것 아니면서도 아름답고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성급하게 달려온 나의 행적을 잠시 뒤돌아보며 숨고르기를 해야겠다. 그런 여유를 갖고 싶다.
집에 들어온 나는 아내를 포옹했다. 그리고는 “황사가 걷히는 날, 단둘이 꽃놀이 가자!”고 했다. 아내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허허 웃으니, 아내도 하하 웃는다.
내 가슴을 누르고 있던 누런 황사가 걷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