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서 수필가의 왕코르왓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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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달러와 앙코르왓(Angkor Wat)

                                                   이 미 서

     

    한국에서부터 캄보디아 씨엠립(Siem Reap) 공항에 도착하는 데는 5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비자를 발급받으라고 여행사에서 미리 일러주었기에 입국장을 지나자마자 사람들 곁에 줄을 섰다. 비자발급비용으로 1인당 20불을 챙겨가라고 일렀기에 60불을 꺼내 들었다. 아이 둘을 포함 3명의 비자가 필요했던 터였다. 60불을 손에 쥐고 차례를 기다렸다. 이윽고 차례가 되었다. 비자를 발급하는 공항직원은 내 여권을 들고 만지작대고 뜸을 들이더니 조금 더 기다리고 있자니 영어가 아닌 모국어로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더니 못 알아듣는 듯하자 그는 내게 뜬금없이
     “원 달러!”
    만 외쳐 대는 게 아닌가? 그래도 설마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직원 머리맡에 비자 발급수수료를 명시해놓은 가격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에 비자발급 수수료가 명시되어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항변을 해보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게는 기다리게 하는 불리함이 돌아왔고 내 여권을 볼모로 계속 돈을 요구하는 그들의 태도에 내 주머니도 열리게 되었다. 3달러를 건네자마자 비자가 배부되는 쪽으로 전달되었고 그들은 내게 감사합니다. 라는 어눌한 한국말과 함께 비자를 건넸다. 사실 도장만 찍으면 되는 것이었으니 얼른 웃돈을 건넸으면 진작 받았을 비자를 다른 사람들 다 받고 나서 비자를 받아들게 된 터였다. 입국 심사대로 발걸음을 옮기자 거기에서도 여권을 넘겨받고는 또 원 달러를 외치는 것이 아닌가? 캄보디아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했는데, 눈먼 돈은 나보다 먼저 입국심사대를 제 발로 걸어 나갔다.

    순간 당혹스러웠다. 외국 관광객이 입국 후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에서 캄보디아의 모든 것을 본 것 같은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도무지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말도 안 되겠지만, 캄보디아 사전에 도덕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을까? 라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캄보디아는 내게 굉장한 매력을  심어준 나라다. 세계 7대 불가사의를 간직한 나라!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앙코르왓(Angkor Wat)을 건국하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국이었으며 장엄한 신비를 간직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캄보디아는 많은 나라 중에서 유독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한 신비함을 간직할 것 같은 그런 나라였다. 관광버스에 오르면서 왠지 모를 허기와 불쾌감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1세기경 카운디냐라는 인도 브라만에 의해 건설된 후난 왕국이 현재 캄보디아 역사의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다. 후난의 후신격인 ‘첸라’ 왕국은 자야 바르만 1세가 사망하고 나서 육첸라와 수첸라로 양분되었으며 9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대륙 동남아시아를 평정한 앙코르 왕국은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국이었으며 왕코르왓(Angkor Wat)과 앙코르톰(Angkor Thom)과 같은 고도의 발달된 유적을 남긴 위대한 국가였다. 14세기를 전후로 쇠약해진 캄보디아는 급기야 ‘아유타아’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1471년에는 참파 왕국을 흡수하고 캄보디아 쪽으로 세력 확장을 꾀한 ‘베트남’과의 사이에서 압박을 당했다. ‘태국’과 ‘베트남’의 영향력에 따라 이들 사이에서 좌지우지되는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민중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운 크메르루즈는 민주 캄푸치아로 국명을 바꿨으며 1978년 베트남군 5개 사단의 지원을 받아 헹 쌈린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으로 개명했으며 또다시 ‘캄보디아국’으로 변경하였다. 국가 통치자가 국명을 3번이나 바꿔가며 겨우 나라의 기틀이 정착된 나라! 1991년 10월 4개 정파와 19개국의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파리평화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장기간에 걸친 내전이 종지부를 찍은 비운의 나라이기도 하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내전이 종식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캄보디아는 내부적으로 많은 혼란과 성장통을 겪는 중이다.

    여행 이튿날 아침 우리는 ‘반데이스라이’라는 사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내리자마자 십여 명의 어린아이들이 뽀얀 먼지를 날리며 무작정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늘 태양에 노출되어 피부가 그을려 있으며,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과 맞서고 있었다. 갖가지 잡화를 조그마한 바구니에 담고 안 비싸다고 수없이 강조한다. 한국말이 능숙하지는 못하기에 귀에 꽂히는 말로 한국인 관광객을 우선 유인하는 것이리라. 입장료를 지급하는 곳에 다다를 때까지 그 호객행위는 끊이질 않는다. 사줄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으나 그 생각이 기우(杞憂)였음을 알게 되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첫날 관광지부터 만난 아이들은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까지 차가 정차만 하면 달려오는 것이었다. 가난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고 했는데 한 사람 당 국민소득이 300불 내외인 그들의 허기를 채워주기에 내 얄팍한 주머니는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빈곤해 보이지 않은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길을 가다가 한국 사람만 보면 1달러를 구걸하는 걸 보고 또다시 놀랐다. 그러다 얻으면 좋고 그렇지 못해도 손해 볼 게 없는 아이들이었다. 여행기간 내내 가는 유적지나 관광지마다 이런 아이들과 함께했다. 우리나라도 그런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런 시기를 지나 지금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캄보디아에서는 온 가족이 한 사람 경찰을 만들기에 급급하다고 한다. 서민들이 어지간히 노력해서는 모을 수 없는 돈이지만 온 가족이 협심하여 일정 금액을 모아 경찰이 되기만 하면 한 집안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음 해가 되면 그 동생도 또 그의 동생도 경찰이 될 수 있으니 그야말로 한집안을 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차 안에서 캄보디아의 속속들이 실상을 듣는 도중 인공호수에서 차가 멈춰 섰다.

    차의 진로 방향을 수없이 보아온 아이들은 차의 머리 부분을 따라 돌아서 관광객이 내릴 시점에 먼저 대기하고 있었다. 나도 그간 겪어왔기 때문에 구매를 거절하는 의사로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될 수 있는 대로 무관심한 척 앞만 보고 걸었다. 그들은 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눈치였다. 내 뒤에 달라붙어 ‘사모님 참 이쁘다.’와 ‘날씬해요.’를 연발하며 한껏 세련된 한국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모른 척 걸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대한민국 짜자~~작짝” 한국 월드컵 응원가를 노래하는 게 아닌가? 놀라서 뒤돌아 봤다가 예쁜 미소를 간직한 여자 아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으며 피부와 대비되어 더욱 희게 보이는 치아가 썩 어울리는 아름다운 여자 아이였다. 다른 노래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더니 ‘곰 세 마리’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 뒤를 따라 사내아이들도 합창 하는 게 아닌가? 또 한 번 감탄하고 있는데 한 남자아이가 내 앞에 와서 양산을 내밀었다. 사진을 찍느라고 깜빡한 모양이었다. 건망증에 아차 하는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일본제 양산인데 가볍고 부피가 작아 핸드백에 넣어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고 무게가 적게 나가서 내가 아끼고 아끼는 물건이었다. 언젠가 버스에 두고 내린 걸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더니 언니가 다시 똑같은 것으로 선물해준 것이다. 남자아이가 그 양산을 잘만 이용한다면 한 달 이상은 물건을 팔러 나오지 않아도 될 터였다. 내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그냥 돈을 건네주기는 뭣해서 원칙대로라면 여덟 개 골라야 하지만 바구니에서 한 개씩만 고르고 나서 모두에게 1달러씩을 건넸다. 캄보디아 관광하는 기간 내내 난 이상하게도 가방에서 두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손으로 가방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앙코르 왕국의 후손인 것을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입국하면서 씁쓸했던 마음이 비 갠 하늘처럼 맑은 걷히는 기분이다. 캄보디아는 아직 발전 중이지만 학생들에게 쏟아 붓는 지원금만은 대단하다고 들었다. 맑은 심성을 가진 그들이 머지않아 캄보디아에 비단 수를 놓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입국할 때와 출국할 때 내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분명히 달랐다고 말해줬을 것이다.

  • 글쓴날 : [09-12-03 21:29]
    • 편집국 기자[news@jungnan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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