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지에서 건진 내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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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스여성병원 제1회 출산기 공모전 수상작

    바지에서 건진 내 아들!

     

    우수상 정혜령 (서울시 성북구 동소문동 7가 한신휴플러스아파트 121동 1701호)

    분만 일시: 2003년 2월 7일
    이름     : 이유섭
    성별     : 남
    체중     : 3.28kg
      

     

                            

    띠리링! 핸드폰에 문자가 왔나보다. 무슨 문자인가 보니 남동생이 보낸 문자였다. 내용인 즉 ‘장스 산부인과에서 출산수기공모, 홈페이지참조, 유섭이 낳은 거 올려보셔’라고 씌어있었다. 출산수기라.... 출산수기라...
    2003년 2월, 아직 차가운 칼바람이 매섭게 불던 겨울이었다.
    만삭이 다 된 나는 친정집에서 산후조리를 해야 했기에 큰애와 함께 예정일 2주전에 친정엄마네 집에 와 있었다. 큰애도 장중환산부인과에서 낳았었다. 집안에 유전병인 혈우병 내력이 있는데 혹여 출생시 탯줄의 지혈에 문제가 될까봐 큰애를 낳던 날 소아과의사선생님이 바로 오셔서 큰애를 봐 주셨다. 그런 장중환 산부인과의 배려가 고맙고, 신뢰가 들어서 둘째도 같은 병원에서 낳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5시간 걸려서 첫아이를 낳았으니, 둘째도 빨리 나오겠지.’ 하면서 스스로 잘할 수 있을 거라 최면을 걸었다. 
    2월 7일 오후 5시 30분. 이슬이 비쳤다. 13일이 예정이어서 그나마 느긋했던 우리 집은 갑자기 분주해졌다. 영화보러 나갔던 남동생을 급하게 불러들여 큰애를 맡겨놓고, 친정엄마는 뭐라도 먹어야 힘을 낸다면서 분주히 저녁을 짓고, 친정아빠는 걱정스레 나를 쳐다보셨다.
    이슬 후 바로 진통이 찾아들었다. 남들은 30~40분 단위로 들어온다는데 나는 처음부터 무조건 10분 단위였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가 진통이 가라앉으면 축~처지며 다음 진통을 두려워하는 산고의 고통... 20분 정도 후부턴 진통이 5분 간격으로 찾아왔다.
    친정엄마는 옆에서 병원에 가자고, 얼른 가자고 하셨지만, 난 분만대기실에 그냥 천장보고 누워있는 게 너무 너무 싫어서 집안에서 버텼다. ‘악!’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진통이 잦아들었다. 배는 딴딴하게 뭉치고, 아프고, 허리는 끊어질 것처럼 위아래에서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고양이자세처럼 엎드려도 보고, 일어서도 보고, 왼쪽으로 돌아누워도 보고 하면서 조금이나마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노력했었다. 땀방울이 투두둑 떨어지며 진통의 강도는 더 세게 나를 흔들고 있었다.
    급해진 마음에 병원으로 가자며 나를 부축하고 집을 나서는 친정아빠와 엄마. 차는 장스산부인과를 향해 비상깜빡이를 켜고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고, 나는 진통이 올 때마다 배를 부둥켜안으며 입술을 깨물며 참는 순간, ‘퍽’ 하면서 뜨듯한 것이 쏟아졌다. 양수가 터진 것이다. 커다란 면 트레이닝에 크린베베(아기용 일자기저귀)를 착용한터라 양수가 흐르진 않았다. 갑자기 마음은 더 급해졌다.
    “엄마, 나 양수가 터졌어.” 잠시 후 차는 병원에 도착했다. 친정아빠는 차를 주차하기위해 주차장으로 향하셨고, 친정엄마는 의사선생님을 부르기 위해서 병원으로 뛰어들어 가셨다. ‘뭐야, 나 혼자잖아.’ 난 병원 입구를 향해 올라가려고 애를 썼지만, 진통으로 인해 걸어 갈수가 없었다. 어정쩡하게 배를 틀어 안으며 네발로 기어서 병원계단을 올라가는 나. 몇 개 되지 않는 병원계단은 어쩜 그리도 높던지... 겨울밤 네발로 기어 올라가던 그 계단은 너무도 시리고 차가웠다. 그렇게 병원의 마지막 계단을 기어 올라가던 순간 아이의 머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헉! 이럴 수가! 잠시 후 병원 입구를 통과할 때 우리 작은 녀석은 미끄러지듯이 세상에 첫인사를 하기위해 나오고 있었다.
    ‘드드드득’하면서 탯줄이 빠져나오는 그 생생한 느낌. 그리곤 이내 바지속에서 첫 울음을 터뜨리는 녀석... 미지근한 양수를 먹은 기저귀에, 쫙쫙 잘 늘어나는 스판 면 트레이닝사이로 우리 작은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아기 울음소리에 응급실을 찾던 친정엄마가 뛰어와 나를 소파에 눕히셨고, 자신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아기를 감싸 안으셨다. 새로 들여온 병원소파는 출산의 피로 다 얼룩져버렸다. 야간엔 응급실이 2층이었던 것을 미리 몰랐던 우리는 매점아줌마의 덕분에 1층 로비로 의사선생님을 불러올 수 있었다. 의사선생님과 간호사선생님이 놀라서 뛰어오셔서는 “저체온이 걱정된다”며 아기부터 먼저 체크하셨다. 태어난 시간도 정확치 않아 매점아줌마가 8시쯤 되었다고 해서 출생시각을 8시라고 적었다. 이동식침대에 눕혀져서 분만실로 간 나에게 “산모는 안 아팠나 봐요. 허허허” 하며 웃으시던 의사선생님.
    고생고생하면서 애기 낳은 딸한테 울 엄마 하시는 말씀. “너, 애 낳다가 내가 10년은 수명이 줄었다. 내가 정말이지 별일을 다 겪어. 애 잘못되는 줄 알고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다. 담엔 절대 애 낳을 생각을 말던가, 아님 진통오면 바로 병원으로 들어가라. 아이고, 심장 떨려.” 하시며 쏟아지던 엄청난 잔소리와 질타의 눈빛. 작은 아들을 만난 첫날밤은 친정엄마의 ‘따다다다’ 구수한 잔소리와 함께 그렇게 깊어갔다.
    다음날 아침, 원장선생님이 “하나도 안 아팠던 산모 얼굴 보러 왔습니다” 하시며, 내 방에 들르셔서 내게 불편한 점은 없는지 체크해 주시고 가셨고, 간호사 언니들도 왔다 가면서 고맙다고 했었다. 병원이 개원을 해서 산모가 병원입구에서 애기를 낳으면 그 병원이 번성한다며 고맙다고 하셨다. 아마도 내가 민망해 할까봐서 병원이 번성할 것이라는 덕담으로 나를 배려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마웠다.

  • 글쓴날 : [10-05-24 09:53]
    • 편집국 기자[news@jungnan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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