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겁과 찰라, 이중성을 가진 시간
미하엘엔데의 모모
진정한 시간은 시계나 달력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재기 위해 달력과 시계가 있지만,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누구나 알고 있듯 개개인 마음먹음과 동시에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작가 미하엘 엔데는 천재성이 엿보이는 작가로 소재를 일반화하지 않는다. 앞,뒤 탄탄한 구성을 자랑하며 치밀한 스토리 전개와 문장력은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작가의 역량을 한껏 엿 볼 수 있게 만든다. 발간 40년을 넘겼지만 구식이거나 진부하지 않은 스토리이며 작가의 화려한 필력에 힘입어 긴 시간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책이다.
모모는 정체불명의 아이이며, 자신의 정확한 나이도 모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다. 그가 거처하는 원형극장은 낡았지만 규로로 보아 한순간 전성기를 누렸음직한 크기의 건물이다. 모모는 다 떨어진 옷에 고수머리를 하고 있지만, 맑고 큰 눈망울을 간직한 아이다. 원형극장은 밤낮 할 것 없이 사람들의 활기로 넘쳐났다. 그들은 모모에게 모든 어려움을 내려놓고 집에 돌아갈 때는 반대로 많은 것을 얻어가지고 돌아갔다. 모모에게는 왠지 모를 마력이 있었고 특별한 재주가 있었는데, 그것은 남의 말에 귀 기울여 듣는 일이었다. 언제부턴가 마을에서는 문젯거리가 생기면
"모모한테 가보게."
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모모와 가장 친한 어른 친구는 도로청소부 '배포'와 여행안내원 '기기' 가 있었다. 배포는 아주 느리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지만 진실했고, 기기는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말솜씨를 자랑하는 허풍쟁이였다.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에 어느 날 회색 신사들이 찾아온다. 그들은 회색정장에 회색 서류가방을 들고 입에는 회색 시가를 물고 다녔으며,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시간을 절약하게 만들고 그 시간은 엄청난 수익과 연결된다는 괴변을 늘어놓는다. 사람들을 현혹되어 시간을 절약하게 되지만, 삶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말은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어른들로 시작해서 차츰 아이들까지 시간을 빼앗기게 되자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북적이던 모모의 원형극장은 쓸쓸한 빈 바람만이 맴을 돌 뿐이었다.
회색 일당 중 한 명은 이발사 '푸시'에게 접근해서, 늙은 어머니와 얘기하는 시간, 노래하고 독서하는 시간, 잡담하는 시간 등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너무 많이 쓰고 있다고 경고하며 하루에 최소 두 시간씩을 절약할 것을 충고했다. 그 말에 현혹된 푸시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멀리 떨어져있는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늙은 어머니는 양로원에 보내버린 다음 시간을 쪼개서 하루 종일 땀 흘려 일을 하기에 이른다. 시간을 쪼갠 댓가로 금전이 모이게 되자 일하는 사람을 더 둘 수 있게 되었고 가계가 번창했으나 푸시는 왠지 모를 고단함을 느끼게 되었다.
회색 일당이 마을로 들어온 다음부터 어른들은 바빠지고 모모에게 오는 사람은 기기와 베포뿐이었다. 기기마저 회색일당에게 넘어가고, 어른 중에는 베포만이 회색일당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베포는 꿈속에서 본 회색일당의 재판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지만 아무도 회색일당이 시간을 훔쳐갔다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모모의 뒤를 쫓는 것을 알자 모모의 안위를 위해 베포는 회색일당에게 시간을 저당 잡힌 채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일의 노예로 전락한다.
회색집단이 사는 도시로 이끌려나온 사람들은 출세와 금전이 늘어나고 성공할수록 삶에 여유 없이 고단했다. 점차 무표정해지고, 의욕이 없어지고,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됐다. 이런 증상은 점점 더 커지고, 하루하루 더 악화되었다. 그렇게 되자 기분이 언짢아지고, 가슴 속이 텅 빈 것 같은 허허로움을 느꼈고, 스스로와 이 세상에 대해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결국 그 감정마저도 느끼지 못하고, 모든 일에 무관심해지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화도 내지 않고, 뜨겁게 열광하는 법도 잊고, 기뻐도 슬퍼도 하지 않으며, 웃음과 눈물을 잊고 살아갔다. 사람들은 그렇게 차디차게 변해서, 그 어떤 것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변한 자신에게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나게 만든 병명은 바로 ‘지루함’이었다.
다수의 종교가 수세기동안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신의 존재성보다는 신에게 고할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인간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인간은 늘 분주함에 묻혀 누군가의 이야기에 긴 시간 귀 기울이지 못하지만, 신은 인간이 원하기만 한다면 한량없이 기도를 들어주신다. 신이 그 기도를 설령 이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저 듣고 있어주는 신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리라. 인간은 본래부터 기도가 이뤄지기 보다는 모모와 같이 기도를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초공간에서 사는 호라 박사가 보낸 카시오페아라는 거북이를 따라 호라 박사를 만난 모모는 회색일당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분개한다. 모모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시간마저 빼앗으려고 하는 회색일당에게 모모는 거대한 모험을 하기로 한다. 호라 박사에게 건네받은 시간의 꽃을 손에 쥔 모모는 카시오페아의 도움을 얻어 사람들에게 빼앗은 시간으로 살아가는 회색일당을 찾아 나선다. 회색일당의 에너지원인 시가를 놓치게 만들고 결국 그들은 바람과 함께 모두 사라져 버린다. 모모가 회색 일당을 처치하고 시간의 흐름을 되돌리자 사라졌던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처음으로 되돌아 왔다.
회색집단에게 공격을 받은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조리 그들의 속셈에 휘말리게 되었다. 회색집단의 마수에 넘어간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을 살아가는 나와 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아닐는지......·지금 걷고 있는 길조차 자신이 왜 가야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앞사람 발자국을 쫒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 그걸 느끼지 못하는, 눈멀고 귀 먹은 가슴들이 수두룩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