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 이별이 주는 교훈
정정순 작가(시인, 화가)
여름장마가 그치는가 싶더니 다시 태풍이 몰아쳤다. 이곳저곳 곳곳에 수마의 흔적이 남아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 오늘은 때 아닌 가을비가 내려 추위를 부추긴다. 하루아침에 몸과 마음이 얼어붙은 이재민들을 생각하니 위로도 못 하고 온 세상 인정어린 손길들을 애타고 슬프게 하고 있다. 가을과 함께 한 자락씩 누렇게 익어 가는 논밭의 곡식들도 한 순간에 진흙 밭으로 변하고 근심어린 농부들의 속 태우는 가슴 막막하기만 한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우울하고 조급해진다. 자연 재해에 목숨도 재물도 잃고, 쓴 가슴을 달래야하는 통곡 속에 두려운 신의 존재를 생각하며 나도 덩달아 지난 세월의 흔적을 돌아본다.
몇 년 전 첫눈이 소복이 쌓인 추운 겨울이었다.
우리가족은 모두가 하루하루를 평화롭게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살만큼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그렇게도 상냥하고 예쁘던 막내딸을 갑작스런 불의의 사고로 하늘나라로 보내야했다. 그날따라 아이들이 일찍 일어나 웬일이냐며 바라만 보아도 뿌듯했는데……. 흰 트레이닝복을 입은 훤칠한 여대생의 그 모습을 지켜보며 행복해 했는데……. 어느 날보다 화기애애(和氣靄靄) 일상생활보다 멋진 아침상을 물렸는데…….
동분서주(東奔西走) 나의 하루는 분주히 시작되어 뿔뿔이 나가는 모습도 지켜보지 못한 채 저녁을 맞았다. 어둠이 시작되고 외화(外畵)를 즐겨보며 텔레비전에 귀 기울이던 시간이었다. 초인종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느닷없이 경찰서 소방서에서 나왔다고 따님일이라고 하면서 “함께 가시지요. 모시고 가겠습니다.” 하여 허둥지둥 따라나섰다. 차고에서 내차를 빼려하니 “우리차로 모시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차에 올라탔다.
경찰서 로비에 앉으라고 하여 앉아있는데 청심환을 따 건네주며 드시라고 한다. 의아해하고 있는데 직원 하는 말이 “놀라지 마세요. 따님이 화재를 입어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보시면 가슴만 아프시니 아버님만 가시고 어머님은 집으로 가서 기다리시지요.” 하였다. 완강히 가라고 하여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무슨 일로 화재를 입었다니 황당하여 별 상상을 다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억지로 떠밀려 집으로 돌아와 태산 같은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그 날. 차마 세상 떠났다고 하면 놀라서 기절이라도 할까 걱정스러웠는지 아무도 병원에도 못 가게 하여 혼자서 슬픔을 감당해야했던 어느 해 초겨울, 그런데 웬 일인가? 살아 다친 것도 아니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인생사(人生事) 이런 일도 있나? 아침에 나가는 것도 못 보았는데......, 친구가 옷을 빌려달라고 하여 옷 싸들고 친구 집에 갔다가 당한 화재였다. 아래층 주방에서 난 사고로 5층 방 까지 불길과 연기로 가득하여 피할 사이 없이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던 딸과 딸 친구가 떠났다. 억울하게 떠난 두 집 딸아이, 온 가족의 슬픔은 물론 모두가 애석해 하는데 북받쳐 오르는 어미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병원에도 못 나타나게 하여 집에서 안절부절 하는데, 그 이튿날 하얀 눈이 소복 소복이 예쁘게도 쌓여 온 세상이 눈꽃 밭이 되었다. 홀연히 세상 떠난 아이의 피부만큼이나 하얗고 깨끗한 눈! 눈 위를 사뿐히 걸어와 “엄마 안녕”하면서 하늘로 올라가 천사가 된 듯하였다.
뜻하지 않았던 갑작스런 사고에 어이없는 슬픔을 나 혼자 가슴에 묻고 참아내기는 너무나 감당할 수가 없는 큰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참으로 악몽 같은 그 날, 하늘나라로 간 그 아이를 잊을 수 없어 밤이면 먼 하늘에 별만 헤아리다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허망함에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가족들은 누가 누구를 위로 할 수도 없고 각자 아픈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집안은 그 좋았던 분위기가 뒤숭숭하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면서 내가 무너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과 내색할 수도 없는 마음을 굳게 다져 보지만 비참한 하루하루가 암흑 속에서 지나갔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을 생각하며 이겨야지 일어서야지 무너지면 안 되지 하면서 내 마음 내가 달래고 부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흘린 피눈물은 겪어 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만났다가 헤어진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를 생각하면서 슬픔의 한을 잊으려 애쓰면서, 일상의 자리를 지키려 안간힘을 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럭저럭 마음 다져먹고 애써 이겨야지 신(神)의 형벌이라면 꼭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면서 메모지 가득 슬픔의 사연을 써 내려가는데 할 말이 너무 많아 그 아이가 좋아하는 노란색의 노트를 한 권 사들고 들어왔다. 하늘로 하늘로 쓸 수밖에 없었던 눈물의 편지! 죽을 만큼 애통해하던 그리움은 하도 슬퍼 죽고 싶었던 나날이었다.
아! 이런 일이 있을까?
내 자신 내 마음 추스르지 못한다면 나를 아끼는 또 다른 사람에게 아픔과 실망을 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무너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참고 또 억눌렀다. 빈방을 지켜 볼 때 마다 스스로 위로도 해보며 참는 것이 얼마큼 힘 든다는 것도 체험했고 뼈를 깎는 아픔도 맛보았다. 꽃이 필 때가 있으면 질 때가 있는데, 아직 지지 않을 꽂이 얼마나 아깝고 억울한지 뼈를 깎는 고통을 씹으며, 신(神)이 나를 혼낸 목적을 되씹어 보았다. 분명 부모님이 나를 나무라거나 혼 낼 때는 잘 되라고 야단치신다는 생각으로 더 잘 되고 슬픔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고 슬픔을 길들이며 아픔을 참아내야 했다. 세월이 약이겠지 하면서 시간 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위로도 타인의 위로도 받을 수도 없는 현실에서 가슴에 대 못 하나는 나의 몫이 되어 내 스스로를 지키며 위로 할 수밖에 없었다.
따뜻하지 않은 바람이 어찌 봄바람이라고 하며 남을 생각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사랑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까이 하던 모든 분들의 그 사랑과 관심 속에서 나만이 겪는 고통이 아니겠지, 우리부모님도 겪었고 또 다른 사람도 겪었을 아픔을 딛고 실망 드리지 말아야지, 보석처럼 소중한 분들을 떠올리면서 용기가 생겼고 당신의 위로도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사람이 무슨 큰 일이 겪고 나면 더욱 성숙해 진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을 뼈저리게 느껴진다.
미치도록 보고 싶은 딸아이의 모습이 스쳐갈 때면 못다 한 후회 속에 그리움은 지치고 힘들 때도 마음 한 공간 공간에 살아있는 당신들의 모습을 나에게 버팀목이 되었기에 나는 바로 설 수가 있었다. 아픔도 길들이면 승화하는 세월이라고 오늘도 따스한 격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기쁨과 사랑과 희망으로 사랑 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이 되고 싶다. 생떼 같은 바람이 휘몰아쳐도 향기로운 차 한 잔 달이는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잘 마무리하려한다.
이 비가 그치면 붉게 물든 단풍잎이 발그레한 모습으로 자태를 뽐내며 어디에선가 그리운 숨소리로 달려오고 있는 것 같은 오후, 아름답게 갈무리 잘 하고 세상에 빛이 될 만한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 애정어린 헌신(獻身)의 마음이 글을 쓰게 하는지도 모른다. 만만치 않은 세상에 되돌릴 수 없는 지난날을 생각하니 보고 싶은 사람이 더욱 눈에 밟히지만 세월이 약이 되는 우리의 삶은 역경을 딛고 아픔을 승화시키면 누구에게나 칭찬이 되지 않을까?
“맑은 하늘에 점 하나 찍었어”
누가 너를 부르더냐
무엇이 그리 급해 할 일도 많은데
너 먼저 떠났느냐
추운 겨울 따듯하게
옷 한 벌 해 입히지 못하고
언 땅에 너를 두고 오던 날
텅 빈 나의 가슴이
갈가마귀 울음으로 따 버리고
생의 아픔 가운데
가장 큰 천륜의 인연을
별리의 아픔으로 이길 수 없기에
오늘도 우리를
갈라놓은 하늘이
너무 원망스럽구나.
정정순 작가 약력
예원예술대학에서 회화과 전공. 이화여자대학원, 연세대학원, 홍대대학원 수료.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과정.
‘맑은 하늘에 점하나 찍었어’외 개인시집 14권 발간, 허난설헌문학상, 일붕문학대상 등 다수 문학상 수상. 개인전 15번, 그룹전 200여회 개최. 신미술대전에 서양화 한국미술대전 동양화 특선, 국제펜클럽 회원, 서울시문인협회 이사, 중랑문인협회 부회장, 불교문학 발행인 및 회장, 예원예술종합대학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