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동진 선생 ‘3월의 독립운동가'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민족 독립과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권동진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충북 괴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권동진 선생은 일찍이 조국 근대화와 부국강병에 관심을 갖고 19세 때 사관양성소에 입학, 여기서 2년의 군사교육 과정을 마치고 육군 초관으로 근무를 시작해 이후 함안군수와 거문도 첨사를 역임했다.
    선생은 그 뒤 10여 년간 일본에서 생활하다 1906년 귀국한 뒤부터 본격적으로 조국 근대화를 위한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교주 손병희의 영향으로 천도교에 입도해 도사로 활동하면서 전도 및 개화운동을 폈고, 나아가 한말 계몽운동 단체로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대한협회에 들어가 부회장으로 활약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천도교 전도 활동에 종사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앞장섰던 선생은 특히 1918년 미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이를 기회로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을 펴기로 결심하고 손병희의 지휘 아래 오세창과 함께 3·1운동을 계획, 추진하는 핵심역할을 했다.
    선생은 오세창과 함께 천도교 내부를 추스르며 독립운동 자금의 준비, 독립선언서의 인쇄와 배포, 민족대표 선정과 독립선언식 준비, 교인들의 동원 등 제반사항을 꾸렸다.
    1919년 3월 1일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계 지도자로 구성된 민족대표들이 모여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던 태화관에서 일본경찰에 피체된 선생은 3년형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출옥 뒤에도 독립운동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세창과 함께 천도교 구파를 이끌면서 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폈고, 신간회에도 적극 동참해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했을 때 진상조사단을 파견하는데 앞장서며 광주학생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다 일경에게 또다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돌아오자 임시정부 환영 국민대회를 주도하고, 신한민족당 당수 및 민주의원 등으로 활동하다 1947년 3월9일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해 관련 자료와 사진을 3월 한 달간 전시하는 한편, 순국선열유족회는 선생에 대한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열 계획이다.

  • 글쓴날 : [09-02-14 18:59]
    • 편집국 기자[news@jungnan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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