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구 ‘일광사’를 아시나요?
‘자비 실천’과 ‘방생 도량’ 대한불교 일광종
매주 수요일 200여명의 노인들이 식사를 한다. 50년간 후원해온 3만5000여장의 인수증 목록
중랑구 망우본동에 가면 주택가 안쪽에 ‘일광사’(사단법인 대한불교 일광종)라는 절이 있다. 겉보기에는 여느 절과 다름이 없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부처님의 말씀이나 뜻을 실천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일광종의 창시자인 일광 큰스님(80·속명 박영국)은 지난 50년을 오직 남을 돕는 일, 즉 자비를 실천하는 종교 활동을 해오고 있다.
‘자비 실천’과 ‘방생 도량’은 일광종의 창시 이념이면서, 큰스님의 ‘화두’라고 할 수 있다. 먹을 것이 없어 숱한 보릿고개를 넘기면서도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생활이 결국 ‘일광사’가 추구하는 독특한 불교의 할 갈래를 만들었다.
불교의 큰 종파인 조계종 등이 ‘법보시’를 한다면 일광종은 ‘물질보시’를 한다. 부처님의 말씀과 뜻을 실천하는 것은 똑같지만, 다양한 ‘보시’ 가운데 어떤 ‘보시’를 중점적으로 실천하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일광사에서는 진정한 불상은 ‘형상불’이 아니라, 살아있는 불쌍한 사람이 바로 ‘참 불상’이다. 내세도 중요하지만, 현세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먹을 것과 환경은 갖춰줘야 한다는 것이 ‘일광종’ 만의 특징이다.
그래서 일광사는 ‘보시’와 ‘방생’을 같은 맥락으로 본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양식과 살림살이를 나눠주는 ‘보시’를 하고, 자기 환경을 찾지 못한 물고기에게는 끊임없이 ‘방생’을 시도한다.
일광사는 불교이면서도, 종교를 초월한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종교를 따지지 않고 양식이 필요하면 식량을, 학비가 필요하면 장학금을 준다.
‘진정한 불상과 중생제도는 마음과 육신이 병든 불쌍한 중생과 함께 하고, 부처님의 말씀(자비)을 전해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결국 부처님의 말씀대로만 실천하면 종교를 가를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 일광종과 일광 큰스님의 뜻이다.
“내 모든 것 가난한 자에 주는 것이 진리, 실천하자” 결심
살아있는 불쌍한 사람이 ‘참 불상’…50년을 한결같이 나눔
대전 출신인 일광 큰스님은 1960년대 초 모두가 어렵고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대전에서는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배를 채우기가 어려웠다. 밥 대신 쑥이라도 먹일 요량으로 가는 곳마다 마당에 쑥을 심으라고 했지만, 왜정시절과 6·25전쟁을 거치던 당시에는 도저히 허기를 달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큰스님도 상경을 결심하고 지인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서울생활에 꼭 필요한 세간과 많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을 정리해 마련한 돈을 지인에게 맡긴 채. 그 하룻밤 사이에 지인은 떠나고 없었다. 모두 털리고 빈털터리가 된 것이다.
결국 큰스님은 빈손으로 상경해 중랑교 아래에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중랑교 아래에는 나병환자 50여명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구걸 반, 보시 반으로 밥을 얻어와 이들과 나눠먹었다.
일광 큰스님은 꼭 51년 전인 1962년 3월, 큰 결심을 한다. ‘나의 있는 모든 것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진리요 믿음이니라, 실천하라’다. 큰스님의 이런 결심이 일광종을 창시했을 뿐더러 50년이 지난 2013년 2월, 4만여 가정에 쌀과 장학금을 후원하는 대장정의 길을 열었다. 그동안 전국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준 쌀과 장학금, 생필품 등은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지난해 3월부터 10월까지 전국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달한 쌀은 2만5000kg. 20kg짜리 쌀을 기준해도 1200포대가 넘는다. 가정마다 후원하는 물품 말고도 망우본동 주민센터와 군부대를 통해 생활이 어려운 주민들에게 매달 쌀을 지원해 오고 있다. 여기에 매주 수요일 점심때면 일광사 앞마당에서는 무료급식센터가 차려진다. 무료급식을 열 때마다 200여명이 찾아온다. 60세 이상 주민을 대상으로 하지만, 조건에 맞지 않아도 급식을 한다. 말 못할 어려운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랑교밑에서 나환자들과 구걸한 밥 나누며 ‘보시’ 시작
‘중이 주는 쌀 안받겠다’고해, 법복까지 벗어부치고 활동
일광 큰스님은 평소 법복을 입지 않는다. 법복을 벗은 사연이 있다. 하루는 강원도 영월군에 쌀을 전달하러 갔는데, 앞을 못 보는 영감님이 참 어렵게 살고 있었다. 다섯 식구가 먹을 것은 물론 추운 날씨에도 맨바닥에서 이불 하나만 덮고 자는 것이었다. 하나 남은 이불마저도 서로 덮으려고 잡아당기다 보니 다 헤져서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안쓰러워서 전기장판과 이불을 사다줬다. 이후 두 번째, 세 번째 쌀을 주러 갔는데 계속 전기장판을 쓰지 않고 한 쪽에 버려뒀더라는 것이다.
“고장난 장판을 줘서 쓰지도 못하고 버렸나”하는 생각에 미안해서 “고장나서 버렸냐”고 묻자, “‘목사님이 마귀가 들었다고 해 버렸다’는 거야. 어찌나 화가 나고, 분하던지 그 길로 파출소를 찾아갔어. 마침 소장이 있기에, ‘하나님이 있다면 그 목사부터 잡아가라’고 했어. 그러고 나와서 ‘엉엉’ 울고 왔어”
중랑구의 한 고아원에서는 쌀이 부족해서 아이들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쌀을 가지고 갔더니, ‘중이 주는 쌀은 안 받겠다’는 것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주린 배를 채울 길이 없는데도 종교가 다르니 쌀을 받지 않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 길로 법복을 벗었다. 종교가 배고픈 사람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도와주는 사람이 바뀌면 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리고는 지금껏 법복대신 일상복 차림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활동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일광사는 쌀나눔을 하면서도 원칙이 있다. 절대 후원을 받지 않는다. 상당히 많은 재원이 필요할 텐데 모두 불자들의 올린 공양미로 충당한다. 있는 만큼 나누면 된다는 생각과 실천이 50년이 넘어선 쌀나눔을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 되는 것이다.
큰스님은 지금도 쌀 지원과 방생 활동에 종종 나선다. 지방을 갈 때면 차 안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식사는 라면 등으로 대충 때운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제 것을 아껴서 해야 돼. 내가 가진 것을 나눠야 돕는 것이지, 남한테 받아다 하는 것은 ‘보시’라고 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