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수필가 최복룡
일요일 아침, 식구들이 잠에서 깰까 조심스레 아침준비를 해 놓고 조용히 현관을 나섰다. 밤새 잠을 설치며 고민하다가 마음을 다스리기에는 조용한 산이 좋을 것 같아서 ‘수종사’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동 서울에서 양수리로 가는 버스를 타고 앞자리에 앉아 초점 없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자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이틀 전, 남편과 처음으로 심하게 다툰 후 냉전 중이었다. 다투고 난 그 순간에는 무조건 남편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남편이 먼저 사과하기 전에는 언제까지고 말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눈도 마주치기도 싫어 계속 외면을 했다.
그러나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자 미운 마음이 서운함으로 변하고 서로 말을 하지 않는 답답함은 고문이 따로 없었다. 시시비비를 가려보지도 못하고 말을 끊어버린 경솔함도 후회가 되었다. 서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또 인정받고 싶은데 남편역시 모른 척 쳐다보질 않았다. 그대로 마음이 굳어 돌이 되어 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 먼저 말을 하자니 멋쩍은 마음이 들고 그냥 모른 체하고 있으려니 하루가 열흘 같았다. 그대로 있다 보면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 서운한 마음이 터져 버릴 것 같아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나선 것이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자 쌀쌀한 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속상한 마음에 생각 없이 나오다보니 너무 얇은 옷을 입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얼어붙은 마음보다야 더 추우랴 싶어 그대로 마을버스를 탔다. 터미널에서 ‘수종사’로 가는 버스는 오늘 따라 텅 비어 있어 더욱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도 타는 사람이 없자 버스는 나 혼자만 실은 채 출발했다. ‘수종사’에 가려고 한다며 내리는 곳을 부탁하고는 민망한 마음도, 쓸쓸한 마음도 감추고 싶어 모자를 푹 눌러썼다. 한 시간쯤 지나자 기사는 이곳에서 마을버스를 이용하라며 허허벌판에 나를 내려놓고 먼지를 날리며 가 버렸다. 사라지는 버스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하고 있으려니 마침 택시가 앞에 와서 서 주었다. 나처럼 그 자리에서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기사가 묻지도 않은 얘기를 해주었다.
운길산 입구에서 ‘수종사’까지는 꽤 먼 거리였지만 찹찹한 마음을 달래려고 천천히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곳곳에 세워둔 차들이 꽃샘바람에 몸을 맡긴 채 주인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이곳에 올 때면 중간쯤에 차를 세워두고 남편과 같이 오르던 길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는 것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올라가자니 더욱 힘이 들었다. 터벅터벅 걸어서 중간쯤에 올라서니 신혼부부처럼 보이는 연인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다정하게 어깨에 팔을 두르고 활짝 웃는 표정에 행복까지 담아주고 나서 다시 걸었다. ‘우리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남편은 길을 가다가도 괜찮은 배경만 있으면 차를 세우고 아이들과 나를 이리 저리 돌려세우며 참 많이도 찍어주었었다. 그 생각을 하자니 다시 쓸쓸함이 밀려왔다. 공연히 싸웠나 조금만 더 참을 것을. 아니 남편이 화를 내지만 않았어도.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오르다보니 어느새 ‘수종사’에 도착했다. 잠시 땀을 식히려고 다도원의 쪽마루에 걸터앉았다. 청바지를 입은 젊은 아빠가 아이가 깔깔대는 예쁜 표정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함께 왔더라면 멀리 두 물머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주었을 텐데.
씁쓸해 하며 고개를 숙이려니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발밑으로 날아들었다. 무료하던 차에 잘 되었다 싶어 녀석을 지켜보았다. 열심히 흙을 헤집으며 과자부스러기를 줍더니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고 작은 눈에도 내가 쓸쓸해 보였나보다. 날아가 버릴까봐 발도 움직이지 못하고 주시를 하고 있었는데 고만고만한 또래 아이들이 와! 하며 덤벼드는 바람에 멀리 숲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눈으로 쫓았지만 바쁘게 날아 가버린 흔적만이 허공에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잠시 쉬는 사이 땀이 마르자 등이 서늘해졌다. 천천히 법당으로 향했다. 법당에는 서너 명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삼배를 올리고 나서 무릎을 꿇고 부처님께 어찌해야 좋을지 답을 달라고 했다. 조금은 심란한 표정을 지으시며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모든 걸 너그럽게 받아들여라. 그리고 화가 나는 마음일랑 이곳에 벗어놓고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거라.’
눈물이 핑 돌았다.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줄다리기를 하는 내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묻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갑자기 법당 문이 열리며 환한 빛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햇살이 따뜻해지자 스님께서 법당 문을 활짝 열어놓으신 것이었다.
햇살에 등이 따뜻했다. 나비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법당으로 날아들었다. 넋 놓고 앉아서 나비의 노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부처님을 바라보니 빙그레 웃고 계셨다.
법당 문을 나서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집에 가면 내가 먼저 말문을 열어야지. 그리고 말해야지. 다시는 이런 힘겨운 줄다리기는 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