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스여성병원 제3회 출산기 공모전 수상작
분만 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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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빈아빠!! 애 울잖아 뭐해??”
“나 지금 화장실에 있는데, 자기가 좀 봐주면 안돼??”
“지금 설거지 하고 있잖아..얼른 나와~~!!”
난 입안에 가득찬 치약거품을 대충 헹구고 헐레벌떡 뛰쳐나와 울고 있는 애를 번쩍 치켜 올렸다.
“우리 수빈이 심심했구나 엄마아빠가 안보여서 무서웠어? 응?”
그제야 애가 울음을 멈추는 듯하더니 내 품에 꼭 안긴다. 아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자니 차츰 잊혀져가던 지난날 기억들이 하나 둘씩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늘 그렇듯 나는 보채는 애를 업고 베란다로 나가 저 멀리 보이는 한 건물을 응시하곤 한다. 여기저기 오가는 차량들과 번쩍대는 네온사인들을 뒤로하고 유독 눈에 띄는 한 건물. 바로 ‘장스 여성병원’이다. 22층 아파트 베란다 밑으로 바로 보이는 저 병원이, 지금 품안의 우리 아이에게 세상을 보게 해준 곳이다. 이제 태어난 지 벌써 100일이 다 돼간다.
38세의 느지막한 나이에 결혼을 하고 9개월 정도 지난 지금 무렵이었을까. 아내가 병원을 같이 가보자고 하여 항상 지켜봐 왔었던 장스여성병원을 찾아갔다. 살면서 산부인과 병원은 처음인지라 어리둥절하면서도 살짝 긴장이 되었다. 순서를 지키고 함께 들어간 진료실에서 초음파검사를 하였다. 갑자기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설명하지 못할 기운이 몸 전체를 휘감았다. 육안으로 보기엔 점이나 다를 바 없는데 그게 우리 아이라고 하는데 순간 기분이 묘했다. 5주됐다며 임신이라고 한다.
병원을 나온 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해냈구나 하는 안도감이 먼저 찾아왔다. 아내도 기뻤는지 배를 만지작만지작 거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제 곧 나도 아빠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뭔가 모를 묵직함이 가슴속에 차왔다. 아내가 임신을 했는데 남편인 내가 그냥 지나치기에는 뭔가 공허했다. 이벤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퇴근 후 저녁, 아내가 화장실을 간 사이 몰래 사들고 온 케이크를 안방 가운데 놓고 초를 하나 켠 후 실내등을 끄자 분위기가 나름 연출이 됐다. 나는 재빠르게 정장차림으로 갈아입고 작은방에 몰래 숨어있었다. 5분정도 지났을까 아내가 소리를 지르며 깜짝 놀라고 있었다. 이 때 난 함께 사온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축하송을 부르며 안방에서 놀라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 축하 합니다 축하 합니다 당신의 임신을 축하 합니다~♬
♬ 축하 합니다 축하 합니다 당신의 임신을 축하 합니다~♬”
그녀의 얼굴이 벌게지고 눈물이 글썽거려 보였다. 아내이기 이전에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나 자신도 대견함을 느꼈다. 평소 마음표현에 서툴렀던 나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다. 행복하게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야겠다는 우리의 믿음이 타고 있는 촛불보다 더 밝고 영롱하게 빛이 났다.
아기가 얼마나 자랐을까 내심 걱정되기도 하며 방문예약 날짜를 기다렸다. 아직도 눈에 선한 그때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임신 10주차 쯤, 점으로만 보였었던 아기의 팔다리가 어느덧 자라서 꼬물꼬물 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분명 살아 움직이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처음 임신사실을 알 때와는 또 다른 기쁨이었다 아니 감동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태명을 평소 ‘달차’ 라고 불러왔던 아내와 나는 그때부터 ‘꼬물이’라는 별명도 지어주었다. 참고로 ‘달차’는 달이차서 건강하게 태어나라고 아내가 지어준 태명이다. 정말이지 달이차고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뼛속까지 묻어난다. 아기 초음파동영상을 핸드폰으로 다시 볼 수 있다고 하여 아내와 나는 보고 또 보고를 반복하였다.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내 생애 이런 감동적인 영화는 본적이 없는 거 같다. 아내와 내가 만든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이 아니던가. 아내와 난 서로를 다독여주며 행복한 가정을 만들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내의 배가 점점 더 올라온다. 아내는 유치원 교사로 평소 애들을 좋아하고 직업의식이 남다른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초음파사진을 날짜별로 스크랩하며 앨범을 만드는데 손재주가 남달라 보였다. 하루 이틀 지나고 앨범이 가득 차가면서 우리 꼬물이도 제법 모양을 갖춰나갔다.
출산예정일이 몇 주 남지 않았다. 점점 시간이 다가오고 아내의 걸음걸이도 전보다 더 뒤처진다. 아내와 난 저녁에 구청 뒤에 있는 가까운 산을 오르기로 했다. 집에서 쉬는 것 보다 걷는 게 분만하는데 있어서 용이하다고 했다. 야밤에 산을 오르기란 쉽지 않지만 아내와 아이를 위해서라면 백두산이라도 오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산을 내려오고 나서는 22층 아파트를 걸어서 올라가기를 수차례 하였다. 내가 힘들어 할 때도 아내는 꿋꿋해보였다. 평소 연약해보이던 아내가 그때는 더 크게 보였다.
점점 예정일이 다가오는데 뱃속에선 아무런 기미가 없다. 당일이 돼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덜컥 겁이 났다. 잘못된 건 아닐까 병원에선 문제없다고 하지만 내심 걱정이 됐다. 다음날 밤늦게 소식이 오기 시작했다. 배가 아프다는 것이다. 진통인지를 확인하고 맞다면 병원에 오라는 것이다. 진통이 불규칙적으로 미세하게 오는지라 하루 더 지켜봤다. 밤새 아내와 씨름하며 상황을 보다가 뭔가 느낌이 왔다며 오전 일찍 병원으로 달려갔다.
가족분만실에 들어선 아내는 긴장해 보였다. 의사선생님이 둘러보시더니 아직 멀었다며 주위를 걸으면서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아내의 고통이 갑작스럽게 주기적으로 찾아왔으나 아직도 아니라고 했다. 아내와 난 2층 고객대기실을 원을 그리며 몇 십 바퀴를 걸은 듯 했다. 3~5분 정도 지나면 아내는 고통스러워하며 나를 꼭 붙잡았다. 이런 아내가 너무 안쓰럽고 미안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에게 무통주사를 놓아줬다. 잠시나마 통증이 가시는 듯 했으나 다시금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며 내 어깨를 붙잡았다. 아내는 다시금 무통주사를 맞았고 또 맞았다. 고통은 하늘을 찌르는데 아직 이란다. 내 마음도 숯처럼 타들어갔다. 병원에 온지 밤을 새가며 20여 시간이 지나 아침이 밝아왔다. 아내는 수술하자고 나를 윽박질렀다. 더는 참기 힘들다며 죽겠다고 한다. 지금까지 견뎌왔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아내를 달래고 달랬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힘들어하는 아내를 뒤로하고 간호사에게 수술얘기를 꺼냈다. 의사 선생님이 둘러보시더니 자연분만 준비하라고 하신다. 천만다행이다. 지금껏 고통을 감내하고 견뎌낸 아내에게 고맙고 한없이 미안했다. 아내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피멍이 얼굴에 가득했다. 산고 끝에 아이가 나왔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탯줄을 자르라고 하는 데 손이 부르르 떨렸다. 어떻게 탯줄을 잘랐는지 정신이 없었다. 아기를 만져보고 있자니 아내가 생각났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겨워하는 아내는 더 이상의 고통은 없어 보였다. 힘차게 울고 있는 아이에게 너무 고맙다고, 힘들었을 아내에게도 너무 고맙다며 난 울먹거렸다. 그리고 의사선생님과 간호사분들에게도 고맙다며 머리를 숙였다.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산후조리원 2주를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복귀하면서 또 하나의 작은 이벤트를 준비하였다. 미리 제작해둔 축하 플래카드를 거실에 걸어 두었다. 나도 이제 어엿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가는 것 같다.
아기가 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든다. 한없이 맑아 보이는 수빈이에게, 건강하게 자라 달라는 아빠의 간절함이 가슴으로 전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수빈이를 건강하게 낳게 해준 ‘장스여성병원’ 관계자분들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