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1. 태조 이성계의 낙원, 망우고개①
애초에 사람들은 발가벗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다. 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로 들어가면서 짐승의 가죽을 꿰매어 몸을 가렸다. 누우면 잠자리였던 것을, 움집을 만들고, 동굴을 찾아 집을 지었다. 씨족집단을 이루어 부족공동체를 만들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집단을 정복하였다. 결국 나라의 틀이 만들어지고, 힘센 자가 지배계급으로 등장하여 백성을 다스리게 되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며 살고 있다.
무릉도원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별천지를 찾아 쉼없이 고개를 넘고 또 넘었다.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 세상, 범죄가 없는 세상, 차별이 없는 세상, 가난한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은 어디에 있을까?
620여 년 전 조선왕조를 일으킨 태조 이성계도 잘사는 사회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나라를 세웠다. 그런 이성계에게 유토피아는 어디였을까? 근심을 내려놓은 망우고개가 아니었을까? 그렇다. 이성계의 유토피아는 망우고개였을 것이다.
자식을 많이 낳은 이성계는, 왕의 자리를 놓고 왕자들이 서로 싸울 것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왕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그게 화근이었다.
이성계는 즉위한 지 1개월 만에 둘째부인 강씨(권문세가 출신으로 거사에도 직접 참여할 정도로 담대하고 지혜로우며 미인이어서 이성계의 총애를 받음)가 낳은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방석의 나이 11살에 불과하였다.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에서는 여진족(女眞族)의 풍속을 따라 추장의 지위와 모든 재산을 막내아들에게 물려주는 풍습이 있었다. 이 전통을 따라 세자의 자리를 넘겼던 것 같다.
이성계가 병석에 눕자, 첫째부인 한씨(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에 세상을 떠남)의 자식들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면서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과 그의 친형 방번을 살해하였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이성계는 식음을 전폐하고, 1398년 9월 둘째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6년 2개월의 왕위를 갖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전쟁터를 누빈 결과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권력의 소멸은 한 무더기 모래성에 불과했고, 불면 날아가는 거품이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넷째아들 방간이 바로 아랫동생 방원을 죽이려고, 개성에서 동복 왕자간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방원의 승리였다. 싸움에서 패배한 방간은 체포되어 유배당하고, 방원이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으로 즉위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성계는 방원에게 어보(왕의 인장)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흥으로 가서 머물렀다. 이후 방원이 이성계에게 차사를 보내면 그때마다 돌아오지 않아 ‘함흥차사’라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아비로서 아들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컸으면 그랬을까?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도 결코 나눌 수 없다는 걸 보여 주는 징표(徵表)였다.
나중에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간청을 받아들여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불도에 정진하며 염불로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석양이 땅끝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마침 이성계는 후원 연못가에 앉아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죽어가는 물고기 하나를 여러 마리가 달라붙어 파먹고 있는 게 보였다.
“거참 괴이하도다. 여봐라, 얼른 뜰채를 가져오너라.”
“뜰채를 어찌 찾으시는지요?”
“저걸 좀 보아라. 한 연못물에 사는 놈들이 서로 달라붙어 늙고 힘이 없어 죽어가는 물고기를 뜯어먹고 있잖느냐?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구나.”
내관이 급히 뜰채를 가져왔다.
“전하! 제가 건져 올리겠습니다.”
“아니다. 뜰채를 이리 다오. 내가 건져 줘야 할 것 같다.”
이성계는 내관의 만류를 뿌리치고 직접 뜰채를 연못으로 집어넣었다. 죽어가는 물고기를 들어 올리려는데, 붉은 노을이 연못물 위로 출렁였다.
순식간에 해가 뜰채로 들어오는 게 아닌가!
이성계는 뜰채를 들어 올리지도 못하고, 하늘에 지는 해를 쳐다보았다.
그때 무학대사의 걸걸한 음성이 들려왔다.
“태상왕 전하! 아직도 건질 게 있습니까? 허허허, 나무관세음보살.”
무학대사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은 이성계는 우울했던 마음이 잠시 사라졌다.
“대사, 대사야말로 어쩐 일이오?”
“전하의 근심을 덜어드리려고 산에서 내려왔지요.”
“그럼 저 뜰채에 들어온 해를 건져보시오.”
“허허허, 뜰채에 들어온 해를 건진다고 지던 해가 지지 않고 다시 하늘에 뜨겠습니까? 헛고생하지 않으셔도 때가 되면 알아서 새로운 해가 뜨고 질 것입니다.”
“지는 해는 반드시 져야 하고, 새로운 해도 뜨고 진다……. 으흠, 들어가 곡차나 한 잔 나눕시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왕사로 삼고 스승의 예를 다하여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럴만한 이유는 충분하였다. 정도전이 역성혁명의 당위성을 가르쳤다면, 무학은 일개 장수였던 이성계를 군왕으로 이끈 대사였다.
무학은 이성계보다 8년 위로 경상도 합천 태생이다. 부모는 박씨로 알려져 있고, 왜구에게 잡혔다가 간신히 탈출하기도 하였다. 안면도에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던 하층민이었다. 18세에 송광사로 들어가 스님이 된 후, 중국 원(元)나라에서 유학을 했다. 그곳에서 고려(高麗) 공민왕의 왕사가 된 나옹선사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불교계는 부패할 대로 부패하였다. 이에 실망한 무학은 오랫동안 토굴에서 수도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이성계를 만나 혁명에 의한 부패 척결을 염두에 두고 새 왕조 건국에 헌신하였다.
무학은 천문지리와 파자점, 해몽술에 능했다. 그리고 풍수지리는 조선에서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도통하였다.
곡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무학이 넌지시 여쭈었다.
“전하, 용안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제가 알아맞힐까요? 허허허.”
“걱정은 무슨 걱정? 아무 걱정 없어요.”
“용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호령을 하지 못해 욱신거리고 있사옵니다. 전하, 부디 옥체를 보전하시고 마음을 비우소서. 자식도 품안에 있을 때뿐입니다. 하오니 네놈들 잘났다, 잘난 대로 잘 해봐라 하고 놔두시지요.”
“허허, 하긴 그래요. 늙고 병든 내가 무슨 힘이 있겠소. 자기들도 나처럼 늙어갈 텐데, 서로 싸우고 죽이려고만 하니…….”
말을 잇지 못하는 이성계의 주름진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열흘 붉은 꽃이 없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인생이 덧없다)을 되씹는 순간이었다.
권력은 달콤한 것인가 보다. 부자지간에도 나눠 쓸 수 없을 정도로 좋은가 보다. 그러니까 한 번 잡으면 놓지 않으려고 권모술수를 쓰는 것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세를 불려 그로인해 얻은 권력은 피를 부르고, 부패로 세상을 뒤덮었다. 출신이 미천한 이들은 능력과 상관없이 배척의 대상이었고, 권력의 부스러기도 만질 수 없었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으면 언제든지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사상을 기반으로 이성계는 역성혁명에 성공했다.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연재를 시작하며>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연재를 시작합니다.
중랑구는 용마산, 망우산, 봉화산이 뒤에 있고, 중랑천을 마주하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면수(背山面水)의 길지로 꼽히는 지역입니다.
중랑천에 풍족했던 물고기, 농사짓기 좋은 비옥한 땅, 꿩사냥에 알맞은 용마산, 그래서인지 중랑구는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면목동에서 기원전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봉화산 기슭과 망우리 고개에서는 청동기 유물들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중랑구는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설화가 많은 지역입니다. 신화나 민담, 전설을 일컫는 설화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흥미와 교훈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설화 속에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기 때문에 시기별로 역사와 풍속 등을 가늠해 보는 중요한 잣대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안재식 작가는 지난 2010년부터 조선왕조실록 등 문헌자료를 참고해 역사와 설화를 연계한 내용으로 ‘설화의 고향, 중랑’, ‘설화에게 길을 묻는다’ 등을 저술해왔습니다. 설화를 소재로 한 소설과 동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랑구 뿌리를 찾고, 지역문화를 정립하자는 취지로 안 작가의 설화를 발췌해 연재를 시작하니 많은 성원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