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태조 이성계의 낙원, 망우고개-2
이성계의 집안은 고려 함흥 출신의 이주민으로 고조부 때부터 중국 원나라 남경(지금의 간도지역)에서 관리를 지냈다. 그러던 중 주원장이 명(明)나라를 세우고 원나라가 대륙에서 밀려나자, 아버지 이자춘은 고려로 귀화하고 소부윤(少府尹)의 벼슬을 받았다. 그리고 공민왕을 도와 원나라를 치는데 공헌하였고, 그 일로 고려의 무관이 되었다. 그후 이자춘은 얼마 가지 않아 병사하여 둘째아들인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와 가문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
이성계의 형은 사냥을 나가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이성계는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활쏘기에 열중하여 조선 최고의 궁수가 되었다. 30여 년 동안 전쟁터에서 살았지만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맹장이었다.
이성계는 1388년 명나라의 요동(만주땅)을 공격하기 위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장맛비가 세차게 내려 5만 명의 고려 대군이 압록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임금에게 요동 정벌이 불가하다는 ‘사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합니다.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에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습니다.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와서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습니다.”
이성계의 상소를, 임금과 최영 장군은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공격을 명령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만주땅 공격을 포기하고, 군사를 돌려 수도 개경(송도, 지금의 개성)을 공격하여 고려를 함락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4년이 흘러갔다. 1392년 7월 17일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을 공양군으로 강등하여 원주에 유배시키고, 이성계는 ‘조선(朝鮮)’왕으로 등극하였다.
이로써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왕씨 통치가 막을 내리고, 이씨가 지배하는 조선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이성계는 고려 왕씨를 모조리 멸족시키려는 방문(榜文)을 붙였다고 한다.
“왕씨들에게 고한다. 섬을 하나 내주어 잘살게 해줄 테니, 왕씨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강화 해안으로 모여라!”
불안에 떨고 있던 왕씨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강화도행 배를 탔다가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 왕씨들은 모략임을 알고 배를 타지 않았다. 그들은 산속에 숨어 살면서 자기들의 성씨를 전(全)씨, 옥(玉)씨, 전(田)씨, 용(龍)씨 등으로 바꿔 목숨을 부지하였다.
‘태조실록’에는, 왕씨 후손들은 아버지 성을 따르지 말고, 어머니 성을 따르도록 한 기록이 있다. 이성계가 정책적으로 왕씨들을 멸족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아들 방원의 추대를 받아 처음에는 고려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국호도 고려로 사용하고, 법이나 제도 등도 고려의 것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중국 명나라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짓고는 태조가 되었다.
그리고 이성계는 고려 국새(國璽)를 명나라에 반납하고, 새 국새를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명나라는 들어주지 않았다. 이성계는 국내용 어보(御寶)를 만들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1403년 이방원이 태종으로 등극한 지 3년 되던 해에 이르러서야 명나라에서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란 국새가 들어왔고, 중국과의 외교문서에만 찍도록 하였다.
하여튼 백성들과의 약속을 어긴 이성계는, 고려왕조를 그리워하며 동요하는 민심을 바로잡아야 했다. 그래서 개성은 이미 땅기운이 다했다고 하면서 왕성을 옮기기로 하였다.
계룡산(지금의 공주, 논산지역)을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역이 협소하여 불편하다는 반대 여론이 들끓어 중지되었다. 무학대사의 의견을 받아들여 1394년 10월 한양(지금의 서울)을 조선의 수도로 삼고 옮겼다.
1398년(태조 7년) 2월에는 서울의 관문인 숭례문(2008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현재 복원 공사 중. 일명 남대문)이 완성되어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뽐내게 되었고, 왕조의 위용을 드높였다. 4대문과 4소문이 세워지고, 종루(종각)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도성 안 사람들에게 희망찬 메아리를 들려주었다.
이성계는 3명의 부인에게서 8남 5녀의 자식을 낳았다. 첫째부인에게서 6남(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2녀를, 둘째부인에게서 2남(방번, 방석) 1녀를, 그리고 성씨 불명인 후궁에게서 2녀를 두었다.
자식들은 많이 두었어도 형제간에 우애가 있기는커녕 권력에 눈이 멀어 난을 일으키고 살육을 일삼았다. 믿었던 신하들조차 붕당을 지어 줄서기에 여념이 없는 사태를 보고 있으려니, 평생을 칼과 활로 지내온 이성계 자신의 인생이 너무 서글펐다. 더욱이 이성계를 따르던 심복들마저도 자식들이 모두 도륙하였으니, 쓰린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조차 주위에 없었다.
겨우 욕심없이 지낸 무학대사만이 살아남아 이성계의 말벗이 되었다.
이성계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 상왕으로 불렸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방원으로부터는 허울 좋은 태상왕으로 뒷방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권력과 자식을 모두 잃은 이성계는, 늙어서 도망갈 힘조차 없어 뜯어 먹히며 죽어가는 연못 물고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뜰채 안에 지는 해는, 다시 뜰 수 없는 해였다.
이성계는 비통한 마음이 들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사, 그동안 전쟁터를 다니느라 조상님들 산소를 돌보지 못했어요. 아버지나 증조부님 묘가 함경도 함흥 안변에 있는데, 항상 마음이 꺼림칙해요. 요즘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게 없으니……. 날이 밝는 대로 우리 묏자리를 잡으러 떠나보십시다. 아무래도 조상님들 묘소를 한곳으로 모아 묘역을 만들어야겠어요.”
“그러시지요. 그렇잖아도 그럴려고 찾아뵈었습니다. 봐둔 터가 있으니, 한 번 가보시지요.”
동천에 환한 기운이 동창을 밝혔다. 두 사람은 서둘러 행장을 차렸다.
이성계는 궁궐을 나와 말을 달렸다. 평생을 활과 칼로 피를 보며 지낸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개혁도 권력도 하룻밤의 꿈이었다고 회한의 속울음을 들이켰다.
경기도 양주군 방향으로 지금의 동대문, 신설동, 월곡동, 묵동, 신내동을 거쳐 산길로 들어섰다.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니 검암산이 지척에 보였다.
그때 무학대사가 산 밑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전하, 저곳을 보시옵소서.”
“대사, 무슨 일이오?”
“보이십니까? 제가 봐둔 터입니다.”
“그래요?”
이성계는 무학대사가 가리킨 쪽을 내려다보았다. 이성계의 눈에는 명당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였다.
“글쎄요, 판단하기 어려우니 내려가 둘러봐야겠소.”
마음이 다급해진 이성계는 쉬지 않고 말을 달려 터를 세심히 살폈다. 땅의 생김새가 조상님들을 옮겨 모실 왕조의 묘역으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을 하였다. 기대가 허망하여 무거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실망한 이성계에게 무학대사가 간곡히 권하였다.
“전하, 다시 찬찬히 살펴보시지요. 선왕들의 능지보다는 전하의 신후지지(身後之地-살아 있을 때 미리 잡아두는 묏자리)로 삼으면 적합할 듯합니다. 여기와 견줄 곳이 더는 없사옵니다.”
“대사가 간곡히 청하고, 말씀이 비범하여 다시 살펴보기는 하겠소만…….”
이성계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살펴보았다. 무학대사의 말처럼 터가 새롭게 눈에 들어오면서 명당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