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
효의 상징, 남장여인 중랑자 2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다. 수령이 옥분이를 불렀다.
“네 효심이 갸륵하여 불렀다. 그렇다고 무조건 네 사정을 봐줄 수는 없구나. 부녀자를 부역시키면 내가 처벌받을 수도 있고, 주위에 보는 눈들도 많아서 입장이 곤란하다만……, 남자 옷으로 변장하고 부역할 수 있겠느냐?”
“남장을 하고 돌을 나르겠습니다. 그리 해주신다면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남장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지만, 아버지 대신 부역을 허가받은 옥분이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옥분이는 아버지 옷으로 남장을 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송계천 석교를 놓는 일에 참가하였다.
남장을 한 옥분이는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가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 다소곳한 행실도 양반집 도령처럼 의젓하게 보였다.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날, 수령의 딸인 서희가 덕이라는 하녀를 데리고 석교 공사장을 찾아오게 되었다. 거대한 공사가 신기한 서희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남장을 한 옥분이가 서희 앞을 지나갔다. 서희는 일순간 심장이 멎는 듯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저이처럼 아름답고 의젓한 사내가 있다니! 덕이야, 저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오너라.”
덕이는 서희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면서 만류를 하였다.
“아가씨, 여기서 일하는 사내를 알아봐서 뭐하시게요?”
“말이 많구나. 시키는 대로 하여라.”
“알아보기는 하겠습니다만, 수령님이 아실까 봐 걱정됩니다요.”
덕이가 투덜대면서 남장을 한 옥분이에게 뛰어가 붙잡았다.
“이봐요, 우리 아가씨가 뉘신지 알아보라 해서 그러니, 말해주시오.”
“난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오. 일해야 하니 쓸데없이 방해하지 마시라고 아가씨에게 전하시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등에 돌을 지고 가버렸다. 덕이는 냉정하게 거절하는 옥분이에게 더는 말을 시키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가씨, 일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가버렸습니다요.”
서희는 굳은 돌처럼 그 자리에 서서 옥분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뭘 그리 뚫어지게 바라보느냐?”
언제 왔는지, 수령이 서희 옆에 서 있었다.
“아! 아니옵니다. 아버님.”
“서희야, 이제 돌아가거라. 집에 계신 네 어머니가 기다리겠다. 덕이는 아가씨 모시고 얼른 돌아가거라.”
“예, 대감마님.”
서희는 옥분이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려는 듯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가씨!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아버님, 소녀는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수령에게 인사를 한 서희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느릿느릿 움직였다.
옥분이의 모습이 빙글빙글 돌면서 치맛자락을 잡았다 놨다 서희의 마음을 울렁이게 하였다.
“덕이야, 머리는 타듯이 뜨겁고, 가슴은 둥둥 북을 치고 있으니, 이를 어쩌란 말이냐?”
“아가씨, 그 사내가 그리 좋으셨습니까? 쇤네 눈에는 미끈하기만 할 뿐, 사내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양반도 아닌 사내에게 마음이 뺏겼다는 것을 알면 마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그만 잊으세요.”
집으로 돌아온 서희는 잠자리에 들지를 못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들지 못하는 서희의 가슴에 하얗게 으스러진 달빛이 비집고 들어찼다.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오니, 풀벌레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고 나뭇잎이 찰랑대며 밤바람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뺨을 살며시 어루만지듯 불어오는 바람은 석교 공사장에서 만난 미소년의 손길처럼 부드러웠다. 살포시 눈을 감은 서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흐드러진 달빛도 어느새 사그라졌다. 하늘은 푸른빛이 점점 바래지면서 치자로 물들인 것처럼 아침놀이 널찍하게 퍼졌다. 마음을 달래지 못한 서희의 삼단 같은 머리에도 금빛이 퍼지고 있었다.
“아가씨, 일어나셨네요. 잠은 잘 주무셨고요?”
덕이가 옷매무시를 고르며 아침 인사를 하였다.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밤을 샜구나.”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아니다. 앞장서거라. 부모님께 아침 문안을 드리러 가자.”
아침 문안을 마친 서희가 방으로 돌아오더니, 연둣빛 장옷을 꺼내 걸쳤다. 그리고는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주위를 살폈다. 마당에는 보랏빛 과꽃과 붉은 꽃무릇이 햇살에게 희롱을 받으며 함지박만큼 퍼질러 있고, 집 안팎은 조용하였다.
‘멀리서나마 얼굴을 보고 와야 오늘밤을 보낼 것 같구나.’
서희는 연둣빛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석교를 놓는 공사장으로 바쁘게 걸었다. 수령의 눈에 띄지 않도록 송계천 언덕으로 올라섰다. 남장한 옥분이를 찾느라, 공사장 일꾼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런 서희의 눈길을 전혀 모르는 옥분이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고통을 참느라 비오듯 땀을 흘렸다.
아침에 일터로 나오면서 옥분이는 물도 마시지 않고, 식사도 하지 않았다.
옥분이 아버지는 전혀 먹지 않는 딸을 보면서 공사장 일이 힘들어 그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먼 장애를 가진 신세를 탓하며, 옥분이 몰래 눈물을 훔치면서 괴로워했다.
옥분이는 석교를 놓는 공사장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하였다. 일도 못하고 맘에 들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수령이 알면 집으로 돌아가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버지를 다시 공사장으로 나오라고 할 것 같아 두려웠다. 옥분이는 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프더라도 참아야 했다.
하지만 생리 현상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배변할 때는 앉아서 일을 보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소변은 남자처럼 서서 눌 수가 없어 괴로웠다.
‘어떡하지? 보는 사람이 많아 쪼그리고 앉아 소변을 누면 이상하게 여길 텐데, 여자로 발각되면 큰일인데…….’
옥분이는 걱정이 되어 목이 타도 물을 먹지 않고 지냈다. 여자로 발각되면 곤욕을 치를 것이 뻔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참기 어려웠다. 옥분이의 몸은 바싹 여위고, 점점 힘도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