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의 상징, 남장여인 중랑자③
한낮 태양이 지글거렸다.
일꾼들은 점심을 먹으려고 그늘 밑을 찾아 자리를 옮겼다.
옥분이는 집에서 싸온 소금으로 뭉친 주먹밥을 들고, 서희가 숨어 있는 언덕 밑 소나무 아래로 자리를 잡았다.
남장한 옥분이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된 서희의 가슴은 쿵덕쿵덕 물방아를 돌리고, 손발은 바들바들 떨렸다. 잠든 병자가 밤거리를 걷듯이 언덕 아래를 향해 살금살금 내려갔다. 소나무 등걸에 몸을 숨기고는 남장한 옥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낀 옥분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보았다.
“뉘시오? 보아하니 양반집 아가씨 같은데,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인기척도 없이 얌생이처럼 말이오.”
남장한 옥분이를 코앞에서 바라보게 된 서희는 변명도 하지 못하고, 발그레 익은 사과처럼 낯을 붉히며 돌아섰다.
“여기는 아가씨 같은 여인이 올 데가 아닙니다. 어서 돌아가시오.”
내심 놀란 옥분이가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누구를 좀 만나러 왔으니, 내게 가라마라 하지 마시고, 먹던 밥이나 드시오.”
“사람을 만나려면 관원에게 물어보시죠.”
“알려주어 고맙소. 그런데 댁은 뉘시오?”
누군지를 묻는 서희의 질문에 옥분이는 순간 당황했다. 얼떨결에 아버지 이름을 대주고는 일터로 급하게 달려갔다.
“중이라고 합니다. 난 그만 일하러 가야 합니다.”
이름을 알아낸 서희는 큰 보석을 가진 것처럼 기뻤다.
‘중이! 중이라고.’
중이의 이름을 중얼대며 공사장을 빠져나온 서희는 집으로 돌아와 덕이를 찾았다.
“중이라는 사내가 어디에 사는지 알아보거라.”
“중이라는 사내는 왜, 찾으시는지요?”
“더는 묻지 말고.”
덕이는 알음알음 중이를 찾아갔다. 이윽고 눈먼 아버지와 딸이 살고 있는 집을 알아냈다.
집에는 바람에 날아갈 것처럼 낡고 색 바랜 살림살이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노인이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보고, 덕이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영감님, 이 집에 중이라는 사내가 살고 있습니까?”
“뉘신데, 나를 찾는 거요?”
노인의 대답을 듣던 덕이는 귀를 의심하며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중이라는 사람이 영감이라는 말씀이에요?”
“그렇다니까, 뭣 때문에 오셨소?”
“아, 아닙니다. 집을 잘못 찾은 것 같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덕이는 부랴부랴 빠져나와 서희에게로 달려갔다.
“아가씨! 아가씨이!”
덕이가 방문 앞에서 숨을 헐떡이며 다급하게 서희를 불렀다.
“다녀왔느냐? 그래, 찾았느냐?”
“찾긴 찾았습니다요. 그런데 중이라는 사내는 노인이더라고요. 눈먼 홀아비인데, 딸과 같이 살고 있대요.”
“뭣이라고, 잘 알아보기는 했느냐?”
“그럼요, 그 노인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는 걸요.”
황당한 서희는 덕이를 내보내고 의심 가득한 눈으로 상념에 휩싸였다.
‘아무래도 이 일을 아버님께 여쭤봐야 할 것 같구나.’
한편, 옥분이 아버지는 젊은 여자가 중이를 찾으며 다녀간 일이 마음에 걸렸다. 공사장에서 돌아온 딸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근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너를 이상히 여겨 눈치 보러 찾아온 것 같기도 하고.”
“아버지, 공사장 일은 수령님과 우리만 알고 있는 일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긴 한데, 누가 너를 알아보면 큰일이구나.”
“제가 행실을 조심하고 있으니, 별일 없을 거예요.”
옥분이는 아버지에게 저녁상을 차려드리고, 툇마루에 앉아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어찌해야 하나? 걱정이로구나.’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였다. 달빛은 옥분이의 속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당 구석구석에 내려앉아 허여멀겋게 쌓였다. 여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다. 울타리로 쳐놓은 대나무에 바람소리가 서걱거렸다.
울타리 대나무를 쳐다보고 있던 옥분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호라! 저 대나무를 이용해야겠어.’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옥분이는 울타리 대나무 하나를 잘랐다. 적당한 길이로 잘라 대나무 구멍 속을 최대한 크게 팠다. 그리고는 대나무관을 대고 소변 누는 연습을 하였다.
다음날 옥분이는 자른 대나무를 옷 속에 넣고 송계천으로 나갔다.
서희는 아침 문안을 드리고, 아버지께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버님,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오냐, 너도 잘 잤느냐?”
“아버님, 여쭤볼 것이 있사옵니다.”
“말해 보거라.”
“공사장에 중이라는 사내가 있지요?”
“중이라고?”
“예, 중이라는 눈먼…….”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수령이 화들짝 놀라며 서희에게 되물었다.
“그 아이에 대해 무슨 소문이라도 들었더냐?”
“그 아이요?”
“중이의 딸 옥분이를 말하는 게 아니더냐?”
수령은 옥분이의 비밀이 소문났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서희가 묻는 것으로 알고 중이 부녀의 사정을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희의 가슴은 돌멩이가 박혀 핏줄기 하나하나를 막아가는 것처럼 먹먹하였다.
“그럼 공사장에서 일하는 아이가 중이의 딸, 옥분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렇지. 효심이 가득한 아이니까 절대로 신분이 밝혀져서는 안된다.”
방으로 돌아온 서희는 옥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눈먼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이가 사내가 아니라 여자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사내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