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왕방연의 눈물, 먹골배③
잔악무도한 세조의 폭력을 전달하게 된 왕방연도 분노와 설움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단종의 죽음을 전해들은 정순왕후 송씨는 소복을 하였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큰바위(동망봉-현재 서울 종로구 숭인동 숭인공원에 있음) 위로 올라가 영월을 향해 애간장을 쏟아내듯이 통곡하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모진 세월을 산 비운의 왕비 송씨는 단종이 사사된 후 64년 동안 그를 기리다가 1521년(중종 때) 82세로 생을 마감하였고, 하늘나라에서 단종과 감격적인 해후를 하게 되었다.
단종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터뜨린 왕방연은 서둘러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내 관직을 사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왕방연은, 단종이 귀양 갈 때 백설기를 먹었던 송계원 근처, 지금의 봉화산 아래 중랑천변 먹골(묵동의 옛이름)로 거주지를 옮겼다. 마침 그곳에는 선산도 있었다.
단종에게 물 한 그릇 바치지 못했던 자신을 뉘우치고, 사죄하기 위해 이곳에 자리를 잡은 왕방연은 필묵(筆墨)과 벗하며 초야에 이름 없는 묵객으로 살았다.
무채색의 묵향 속에서 지내던 왕방연은 어린 단종의 애절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한시도 괴로워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달빛이 앞마당에 내려앉고, 고적한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리는 밤이면 더욱 잠들지 못했다. 그럴 때면 앞마당을 서성이며 영월 쪽을 향해 눈시울을 붉혔다.
“전하, 소인이 어찌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요?”
눈물로 단종을 찾다 잠이 든 왕방연의 꿈속에 단종이 귀양행차 당시의 행색을 하고 나타났다. 단종은 몹시 피곤하고 주눅이 들어 지쳐 보였다.
“여보게 금부도사, 귀양행차 길에 보았던 배나무 열매는 익었는가? 희고 달디단 속살 한 입 베어 먹으면 타들어가는 이내 마음, 조금이나마 시원해지겠구려.”
꿈에서 깬 왕방연은 갈증을 호소하는 단종을 생각하면서 배나무를 심기로 하였다.
하얗게 핀 배꽃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이른 봄, 뻐꾹새가 날아와 한나절을 배나무에 앉아 슬피 울었다. 그 풍경을 지켜보던 왕방연의 가슴에도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왕방연은 배꽃에 단종의 눈물어린 넋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배나무를 정성껏 보살폈다. 배나무에 달린 열매는 날이 갈수록 단단하게 여물었다.
단종이 승하한 날은 배 수확을 하는 날이었다.
왕방연은 향기가 좋고, 달처럼 탐스럽게 익은 배를 골라 바구니에 한가득 담았다. 그리고는 영월 청령포를 향해 절을 하면서 제사를 지냈다. 왕방연은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이마를 땅에 짓찧는 고두배(叩頭拜)를 올렸다.
“전하, 배를 수확할 때쯤 다시 궁으로 돌아오고자 하셨지요. 돌아오시지 못하게 한 소인이 죄인이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왕방연은 눈물로서 속죄를 하였다. 벼슬과 권력을 버리고 묵객으로 살고 있는 왕방연은 세조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어서인지 무서울 것이 없었다.
단종에게 속죄하는 길은 배나무를 잘 키워서 달고 맛있는 열매를 익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왕방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배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다음해도 배나무는 어김없이 배꽃을 피워 하얀 꽃잎을 흩날렸고, 뻐꾹새도 어김없이 날아와 슬피 울었다. 배꽃이 피는 달밤이면 왕방연은 배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영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했다.
그해 10월에도 왕방연은 단종의 제삿날에 수확한 배를 골라 청령포를 향해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고두배를 하였다.
그날 밤 제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왕방연에게 단종이 다시 찾아왔다.
“금부도사의 눈물과 충정으로 가꾼 배를 먹으니, 이제껏 꽉 막혀 있던 체기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소. 고맙소. 그나저나 언제쯤에나 나도 귀양살이를 끝낼 수 있을까? 귀양살이를 끝내고, 바람따라 훨훨 날아다니고 싶구려. 하얀 배꽃처럼, 뻐꾹새처럼, 훨훨 말이야.”
단종의 혼령은 죽어서도 귀양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방연은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머리를 땅에 짓찧으며 피를 흘리고 통곡을 하였다.
단종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시달렸던 왕방연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속죄를 하면서 변함없는 절개를 지켰다.
“내가 죽으면 영월 가는 길에 묻어 주고, 주변에 배나무를 많이 심어라.”
후손들은 왕방연의 유언대로 신내동과 묵동의 접경지대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런 연유로 그가 살고 묻힌 곳을 왕방골이라고 불렀다. 언제인지는 모르나 후손들이 왕방골에 있던 무덤을 이장하였다.
왕방연이 손수 심었던 배나무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왕방연의 눈물과 정성으로 가꿔진 배는, 오늘날에도 ‘먹골배’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충절의 고장 중랑에서 키운 먹골배는, 모래가 많은 토양에서 자라 유달리 단물이 많고, 과육을 한 입 깨물면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달빛이 지면
배꽃도 진다기에
봉화산 둘레길 돌고 도네
삽살개 짖는 밤하늘
별도 지고
하냥,
서러워
사발막걸리에 서글픔 담아
살포시
그대 품으니
톡톡 터지는 꽃잎
아뿔싸,
배꽃은 지지 않고
달빛을 마시네
― 배꽃 연가 / 안재식
배꽃이 흩날리는 달밤, 한잎 한잎 속절없이 쌓이는 하얀 꽃잎은 어린 단종의 슬픔과 억울함이 깃든 눈물방울이었다.
눈물방울이 떨어진 자리에 열린 먹골배는, 충절의 눈물을 흘리며 매일매일 속죄하듯 살다간 왕방연의 마음을 하얗게 담아내고 있다. 지금도 달처럼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