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의 상징, 남장여인 중랑자④
  • 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효의 상징
    , 남장여인 중랑자④

     

    서희는 옥분이를 돕고 싶었다. 곰곰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서희가 덕이를 불렀다.

    “이 주머니를 중이 영감이 사는 집에 갖다 주거라.”

    “아가씨, 이것은 오랫동안 모은 엽전 주머니잖아요. 어찌 이것을 갖다 주라는 말씀입니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누가 주었다는 말도 하지 말거라.”

    신신당부를 한 서희가 장옷을 챙겨들고, 송계천 석교 공사장으로 향했다. 공사장에 도착한 서희는 옥분이를 찾았다.

    대나무관을 매달고 공사장에 일하러 간 옥분이는 다른 날보다 힘있게 보였다.

    잠시 후, 옥분이가 아무도 눈에 띄지 않은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대나무관을 통해 남자처럼 서서 소변을 누었다. 지난밤에 소변 누는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옷을 추스르고 있는 옥분이에게 서희가 다가갔다.

    “거기서 뭐하시오?”

    서희의 목소리에 옥분이가 조급하게 돌아섰다.

    “소변 누는 것을 보면 어떡해요? 아니, 아가씨는 지난번에도 소나무 밑에서 만났었는데…….”

    서희를 알아보고 옥분이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피할 것 없어. 네가 남장을 한 옥분이지? 수령님에게 들어서 다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

    “난 옥분이가 아니라, 중이요. 그리고 뭘 안다는 말이오? 수령님한테 듣다니, 아가씨는 뉘시오?”

    잘못을 저지른 죄인처럼 옥분이가 안절부절못하였다.

    “나는 이 마을 수령님의 딸이야. 그리고 눈먼 아버지와 살고 있는 네 처지도 다 알고 있어.”

    “아이고, 아가씨!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세요.”

    “괜찮아. 나한테는 남자처럼 하지 않아도 돼. 옥분이를 남자인 줄 알고 정을 준 어느 처자가 고생 좀 했지. 호호호, 남장을 하고 일하느라 무척 힘들었겠다.”

    “별말씀을요, 수령님께 은덕을 입어 우리 부녀가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옥분아, 나랑 나이도 비슷한 걸 보니, 우리 친구하자?”

    서희가 옥분이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옥분이는 잡힌 손을 빼면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친구라니요? 절대 안됩니다. 아가씨, 저는 이제 일하러 갑니다. 여기는 위험하니 얼른 댁으로 돌아가세요.”

    서희는 옥분이가 수세미 같은 손바닥으로 무거운 돌을 등에 지고 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워 눈물을 닦았다.

    “여기서 뭘 하느냐?”

    서희는 옥분이를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느라 수령이 온 줄도 몰랐다.

    “아버님, 옥분이를 돕고 싶어요. 여자의 몸으로 무거운 돌을 나르고, 소변도 대나무관을 연결하여 누는 걸 보니 눈물이 납니다.”

    “뭐라고? 대나무관을 연결하여 소변을 누더란 말이더냐?”

    “네, 남자처럼 보이려고 서서 소변을 누는 것 같아요.”

    서희의 말을 듣고 있던 수령은, 옥분이의 사정을 서희로 하여금 마을에 퍼뜨리기로 하였다.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 듣고, 관원과 백성들은 중이의 부역을 면해 달라고 수령에게 간청하였다.

    내심 이런 간청이 들어오길 바라고 있었던 수령은 중이의 부역을 면하게 해주었다. 옥분이의 진심어린 효행이 눈먼 아버지를 살리게 된 것이다.

    공자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덕을 ‘인(仁)’이라고 하면서 그것의 근본 내용으로 제(悌-공경)와 효를 들었다.

    효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의 효행과,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행으로 나눌 수 있다.

    부모가 살아 계실 때의 효행으로는, 공경하며 순종하는 것이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극진히 봉양하고, 뜻을 거스르지 않으며, 공경과 예의로 모시고, 병중에는 정성으로 간호해야 한다.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행으로는, 유해를 살아 계실 때처럼 정성스럽게 모시면서 애틋하게 사모하고, 행동을 근신하는 것이다. 특수한 유교적 상례는 부모의 3년상을 치르기도 한다.

    석교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눈에 띄게 출중한 모습을 한 옥분이를 남자인 줄 알고 중랑자(仲郞子)라 불렀다. 그러나 남장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녀를 중랑(仲狼)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중랑(中浪)의 어원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또한 송계천(일명 충랑포, 중랑포)도 중랑천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임금이 지어 준 이름이 아닌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려 지명이 바뀌는 특이한 경우였다.

    효심이 가득한 옥분이의 눈물어린 사연은, 권력 앞에서 아귀다툼을 벌이던 이방원과 왕족, 당시 세도가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겨 주었다. 지금도 한줌 권세와 명예를 갖기 위해 혈육끼리도 경쟁하는 무리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송계천에 석교가 완성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이방원은 크게 기뻐하며, 신하들과 석교를 찾았다. 석교 주변 냇가에 천막을 치고 주정소(晝停所-왕이 머물러 식사하던 장소)를 차렸다. 석교를 놓는데 공이 큰 관리들을 표창하고, 인근 노인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송계천은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내려 물고기와 게가 많이 살아 낚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피서가 따로 있으랴! 아이들은 물장구를 치고, 어른들은 목욕을 즐겼다.

    이방원은 흡족한 마음이 들어 어명을 내렸다.

    “짐이 아버지 묘소를 찾을 때마다 이곳에서 점심(낮수라)을 들고 휴식을 취할 것이다. 후대 임금들도 모두 그리할 터이니, 여기에 능행소(陵幸所)를 차리도록 하여라.”

    “어명을 따르겠습니다. 전하.”

    신하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어명을 따르겠노라 화답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은 조금 달랐다.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렸다.

    “아버지 살아 있을 때는 임금이 패륜을 일삼더니, 이제 정신이 들었나?”

    “그러게 말이야. 돌아가신 다음에 잘한들 무엇에 쓰랴!”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마음은 전류의 흐름 같았다.

    사람의 기본인 충효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송계천의 석교는 이렇게 백성들의 피와 땀, 옥분이의 효심으로 놓여졌다.

    이방원을 비롯한 역대 임금들은 조상들에게 효를 다하고자 건원릉에 참배를 다녔다. 그때마다 송계천의 석교를 건넜고, 용마산이나 망우산 등지로 사냥하러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백성들이 강원도와 충청지역 등지를 오갈 때 건너는 다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 말기 고종 때, 경복궁을 재건한다고 석교의 윗돌(상판석)들을 해체하여 일부 사용하였다. 나머지 받침돌(주석)들은 월릉교 밑 모래더미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송계천, 지금의 중랑천은 효심으로 눈물을 쏟은 옥분이와 이방원의 슬픔을 안고, 오늘도 유유히 흐르며 효의 근본이 되고 있다.

  • 글쓴날 : [15-05-01 11:30]
    • 편집국 기자[news@jungnangnews.co.kr]
    • 다른기사보기 편집국 기자의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