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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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이방원의 셋째아들이다. 그의 큰형 양녕은 아버지 이방원과 불목하다가 폐세자가 되었고, 충녕이 왕세자에 책봉되어 나중 조선 4대 임금인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세종은 6명의 부인에게서 18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다. 후환을 꺾으려고, 큰아들 향을 8살 때에 미리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일이 자기 뜻대로만 되겠는가. 세종 또한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병약한 세자 향이 5대 임금 문종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임금이 된 지 2년 3개월 만인 39세에 외아들 홍위(단종)를 남겨놓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문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아들 1명과 딸 2명밖에 낳지를 못했다. 문종은 죽기 전에 믿을만한 신하를 불러 세자의 앞날에 대하여 고명(顧命-임금의 유언)을 남겼다.
“짐은 이미 명을 다한 것 같소. 어린 세자를 잘 보좌하여 주오!”
세자는 12살에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6대 임금 단종이다.
나이가 어린 왕은 놀고 싶을 때 놀고, 눕고 싶을 때 누울 수 없는 신세가 불편하였다. 온종일 졸졸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하는 신하들이 귀찮았다. 또한 하루에도 옷을 몇 차례씩 갈아입히고는 군왕의 길을 가르친다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임금의 자리를 탐내는 자들은 살육을 벌일 만큼 욕심내지만, 단종은 귀찮고 서글프기만 했다. 그럴 때면 돌아가신 어머니 현덕왕후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미혼인 단종은 천애고아였다. 현실은 냉혹했다. 문종의 고명을 받든 황보인, 김종서 등 대신들과 왕족들(아버지 문종의 형제들이며, 할아버지 세종의 아들들) 사이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어린 단종은 고명대신들이 하라는 대로 도장만 찍었다.
“전하, 조정 대신들의 인사명단입니다. 여기에다 표시를 해놓았으니, 결재하시면 됩니다.”
이름이 적힌 곳에 대신들이 황색점을 찍어 올리면 그 점 위에다가 낙점을 하면 그만이었다. 이른바 황표정사 제도를 쓴 것이다.
고명대신들을 괘씸하게 여긴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이 왕의 권한을 지킨다는 명분으로‘계유정란’을 일으켰다. 고명대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몰살하고, 그의 친동생인 안평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후 사약을 먹여 죽였다.
단종은 혈육을 친 수양 숙부 면전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였다.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몰라 하루하루 벌벌 떨며 연명하였다.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정신을 놓았다.
그러던 단종이 어느 날부터 아랫입술을 깨물기 시작했다.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눈이 밝아졌고,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할 수양이 아니었다.
‘누가 좋을까?’
수양은 단종의 힘없음을 보여 주고, 자신의 세력을 만천하에 알리려는 궁리를 했다. 그래서 문종의 국상 중임에도 수양은 벼슬이 낮은 송현수의 딸을 간택하고는 혼례를 올리도록 단종을 압박하였다.
“전하, 왕비를 간택하였으니, 혼례를 올리시지요. 적적한 마음도 달래시고요.”
“국상 중인데, 어찌 혼인을 한다는 말이오? 가당치 않습니다.”
단종은 국상 중에 혼인한다는 것이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아 꺼림칙했다. 그러나 수양 숙부가 강권하는 바람에 왕비를 맞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5살에 왕비로 책봉된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성품이 공손하고, 매무새가 단정했다.
정순왕후는 어린 단종을 어머니처럼 누이처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수양의 힘에 억눌린 단종은 왕비를 의지하면서 외로움과 무서움을 떨쳐내게 되었다.
단종이 혼례를 올리고 1년이 흘렀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수양 일파는 마각을 드러냈다. 민심이 흉흉하여 역성혁명이 일어나겠다는 핑계로 왕위에 오른 지 3년 2개월밖에 안되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만 것이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왕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조선 7대 임금인 세조다.
그 후 단종의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死六臣)이 사형당했다.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를 당하였고, 정순왕후 송씨는 궁에서 쫓겨나 단종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또한 세조는 정순왕후의 친정 식구들을 모두 역모로 몰아 학살을 하였다.
남편을 잃고, 친정 식구들을 잃고, 의지할 곳 없는 정순왕후 송씨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서 근근이 보냈다.
왕비였던 송씨가 곤궁하게 지낸다는 말이 퍼지자, 세조는 집과 식량을 보내 소문을 잠재우려고 했다. 하지만 송씨는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세조의 하사품을 받지 않았다.
“내가 걸인이 되어 목숨을 연명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하와 생이별을 하게 한 조정의 동정은 절대로 받지 않겠소. 당장 갖고 가시오!”
단종을 향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면서 동네 아녀자들은 관군의 눈을 피해 송씨를 도와주었다.
입으로 공자왈, 붓으로 맹자왈 하면서 저지른 잔인무도한 세조의 악행이었다.
유배지로 떠나게 된 단종은 마음과 몸이 쇠약할 대로 쇠약해졌다. 귀양을 명한 숙부를 원망하면서 단종은 울부짖었다. 돌부처라도 참지 못할 피눈물의 설움이었다.
“숙부, 나더러 영월로 가라니요? 임금 자리도, 왕비도, 신하도, 모두 뺏어가고도 뭐가 그리 모자라십니까? 나는 노산군이란 칭호도 필요 없소. 모든 것을 내준 어린 조카에게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오!”
단종의 피울음을 달래줄 사람은 아무도 옆에 없었다.
궁궐을 벗어난 단종의 귀양행차가 청계천 영도교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정순왕후 송씨가 들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송씨는 다리 입구에서 단종의 행차를 막아섰다.
“전하!”
“부인!”
초라한 행색을 한 단종과 정순왕후는 서로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허망함에 눈물만 흘렸다.
“부인 행색이 말이 아니구려! 당신과 나의 인연이 오늘로써 마지막은 아닐 것이오. 걱정일랑 모두 잊어버리고, 몸성히 지내시구려. 곧 돌아오리다.”
“전하, 언제까지고 기다리겠사옵니다. 다시 영도교를 건너오시는 날만을 만백성과 함께 손꼽아 기다릴 것이오니, 전하께서도 근심을 모두 털어버리고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짧은 4년간이었지만 격변의 세월을 사느라, 후손조차 남기지 못했다. 부부의 정을 절절하게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던 백성들의 눈가가 붉게 젖어들었다. 죽은 고목에 꽃피기를 바라는 어린 부부의 가슴은 씁쓸하고 서러웠다.
결국 이날의 만남이 두 사람에게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백성들은 더 이상 만날 수 없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땅에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 영도교는 순식간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