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방연의 눈물, 먹골배②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책임지고 호송하는 단종의 영월 귀양행차는 10리를 가고 한 번 쉬었다.
중랑천을 지나 송계원(묵동에 있었던 국립여관)에 머물렀을 때였다.
양성(陽城)에 사는 차성복이라는 사람이 주막 주인을 통하여 보따리 하나를 전하고 갔다. 풀어보니 백설기에 대추를 박아 만든 떡이었다.
금부도사 왕방연은 차성복을 붙잡아 사연을 물었다.
“죄인에게 백설기를 전하는 연유가 무엇인가?”
“듣자하니, 고단한 어린 임금님을 귀양 보내면서 굶기기까지 한다면서요? 귀양 가시는 길, 허기로 쓰러지시면 안되겠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싸가지고 온 것이오. 나를 죽여도 좋으니, 꼭 좀 드시도록 전달해 주시오.”
사연을 들은 왕방연은 차성복의 갸륵한 마음씨에 감동하여 그를 눈치껏 놓아주었다.
행차가 양원리를 지나갈 때, 단종이 금부도사에게 청하였다.
“금부도사, 저 우물물을 태조대왕이 마시고 물맛이 좋다고 했던가?”
“예, 그러하옵니다.”
“목이 타니 우물물 한 바가지만 떠주시오.”
“참으셔야 합니다. 어명이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린 단종이 더위에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마음이 갑갑하고 애가 탔지만 왕방연은 단종의 청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죄인에게는 물 한 방울도 주지 말라’는 칼날처럼 서슬이 퍼런 세조의 어명을 지키기 위해서 왕방연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언제 금부도사의 목도 잘려나갈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햇볕이 내려쬐는 길가에 배나무가 서 있었다. 단종이 그 나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저 배나무에 열매가 익어 수확을 할 때쯤이면 이 길을 다시 돌아올 수 있을런지……. 으흠.”
단종의 중얼거림을 듣고도 못들은 것처럼 왕방연은 흙먼지를 날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귀양행차는 온갖 시름을 없애준다는 망우고개를 넘어갈 때도 쉬어가지를 못했다. 왕방연은 주위의 눈이 무서워 온정을 베풀지 못하고 쩔쩔매기만 하였다.
왕방연은 가문의 영광인 금부도사 직책이 추악하고 원망스러웠다. 권력 앞에서 장님이 되고, 벙어리가 되고, 개처럼 충성해야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개도 주인을 알아본다는데, 자기가 섬기던 주인을 호송하는 일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었다.
단종은 왕방연의 눈빛을 읽고 있었다.
“더우신지요? 얼마나 불편하신지요?”
“참아야지, 얼마나 왔는가?”
“아직 많이 오시지는 못했나이다.”
“영월까지 며칠을 더 가야 하나?”
“꼬박 일곱 날을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금부도사, 나는 이 길을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겠지?”
왕방연은 목이 메어 대답을 못했다.
삼복더위에 끌려가는 단종도, 끌고 가는 왕방연도 고생이 심했다. 침이 마르고, 온몸의 피가 마르는 아픔이 밀려왔다.
단종은 영월 청령포(淸?浦)에 자리를 잡았다. 한강과 합치는 평창강(平昌江)의 마지막 줄기, 남쪽을 빼고는 동·북·서쪽이 강물에 잠기고, 주변의 높은 산마다 아름드리나무가 빽빽한 곳이었다.
소임을 마친 왕방연은 단종의 옥체 만강하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영월을 떠나게 되었다. 어린 임금을 유배지에 홀로 두고 가는 마음은 괴롭고 울적했다. 그는 평창강 나루터에 이르러 한참동안 울었다. 울고 나니, 속이 조금은 후련했다.
왕방연이 애끓는 마음을 읊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천만리나 되는 멀고 먼 길에서 고운 임(단종)과 이별하고 / 내 마음을 둘 곳이 없어서 냇가에 앉았더니 / 저 냇물도 내 마음과 같아서 울며 밤길을 흘러가는구나〉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1457년 10월, 단종은 마루에 걸터앉아 뻐꾹새를 읊었다.
뻐꾹아 뻐꾹아
산마루에 울고 가는 뻐꾹아
초나라 망한 지 어제 오늘 아닌데
너는 혼이 되어 숲속을 헤매이느냐
뻐꾹 뻐꾹 뻐꾹새야
산송장이 된 나의 혼도 실어다 주렴
구름처럼 솟아 있는
저 산 너머로 실어다 주렴
늙은 나인이 단종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다 못해 깊이 상심하면 해롭다고 만류하였다.
“아는 이마다 뻐꾹새가 되었으니, 나만 몸을 돌봐 무엇하리오?”
“그래도 겨울이 오기 전에 좋은 소식이 올 것입니다. 무슨 죄가 있으시다고요?”
“그래요? 나쁜 소식이 아니 오면 다행이겠소.”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시는지요?”
“요즘 꿈자리가 사나워서…….”
단종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사립문 밖이 떠들썩하며 고함소리가 들렸다.
“어명이요, 어명! 죄인은 속히 나와 어명을 받으시오!”
금부도사 왕방연이었다.
단종은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곤룡포에 익선관을 쓰고 다시 나왔다.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왕방연에게 물었다.
“상감마마는 강녕하시오?”
“예.”
“금부도사, 다시 보게 되어 반갑소. 근데 어인 일로 온 것이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말을 마치지도 못한 채, 왕방연이 댓돌 앞에 무릎을 꿇고 몸을 조아렸다. 한참을 엎드려 어깨를 들먹이더니 부스스 일어났다. 두 손으로 남빛 보자기를 쳐들고 단종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엎드리고 말았다.
단종은 떨리는 손으로 보자기를 풀었다.
“아니! 이건 뭐요?”
“…….”
“상감께서 내게 사약을 보냈다는 말이냐?”
“예, 어명입니다.”
“죄도 없이 죽어야 한단 말이냐? 어찌 상감께서 내게……. 이런 억울한 일은 세상에 없다!”
단종은 참았던 피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삭히고 삭힌 그동안의 분노가 핏덩이가 되어 솟구쳤다.
권력의 제물로 비극적인 생애를 마감한 단종은, 17세 어린 소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