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4. 민초들의 희망, 용마산 아기장수①
조상 때부터 인간들은 신의 경계를 넘나드는 낙원을 찾아 꿈을 꾸며 세월을 낚고 있다.
고통 없이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땅, 죽음 없이 영원한 삶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별천지는 어디에 있을까? 무지개 너머에 있을까?
세조는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면 편한 잠을 잘 것 같았다. 그리고 더 이상 단종복위운동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단종의 시신을 왕위에 앉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제부터 나의 왕권을 단단히 쌓아올리면 되는 거야.’
그는 탄탄대로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민심은 세조의 생각과 다르게 어수선했다. 단종을 첩첩산중 영월에서 무참히 죽인 세조에 대한 반감은 일파만파 거칠게 퍼져 나갔다.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지글지글 타오르며 꺼질 줄 모르는 기름처럼 백성들의 분노는 살기가 돌았다.
‘이제껏 명분 없는 살육을 내가 하였단 말인가? 뼈가 부서져도 결코 무릎을 꿇지 않고, 저승길을 택한 단종의 충신들 같은 인사는 정녕 내게 없다는 말인가? 왕조의 앞날은 어찌 될까?’
공신의 탈을 쓰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생각하면 세조의 마음은 허탈하였다.
세조는 마음을 달래려고 왕세자와 함께 비원(秘苑)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였다. 단종의 어머니(문종의 비, 현덕왕후) 권씨가 소복을 하고 앞길을 막아서고 있는 게 아닌가! 세조는 오싹함을 느끼고, 그 자리에 장승처럼 서서 꼼짝하지 못했다.
“내 어린 아들 단종을 죽인 원수야! 어디, 네 아들도 죽어봐랏!”
권씨가 머리를 산발한 채 두 손을 갈퀴처럼 내밀고 달려들었다. 세조는 숨이 턱 막히도록 놀라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권씨는 혼비백산한 세조를 밀치고 세자에게 달려들더니 목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아악! 사람 살렷! 아버지, 저를 살려주세요!”
세자가 비명을 질렀다.
“귀신아, 세자에게서 물러나거라. 내관, 어디 있느냐? 당장 귀신의 목을 쳐랏!”
세조가 소스라치게 놀라 내관을 불렀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꿈이었다. 그러나 꿈치고는 너무나 생생했다. 중병을 앓은 듯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요상한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세조가 꿈을 꾼 이튿날부터 세자가 시름시름 앓는 것이었다. 세자에게도 매일 밤 단종의 어머니 권씨 혼령이 찾아들었다.
세조는 21명의 승려를 궁궐로 불러들여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드렸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세자는 단종이 죽은 그 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바로 의경세자인데, 20세였다.
세상 사람들은 슬퍼하기는커녕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죗값이라며 고소해 하였다. 그리고 권씨의 원한 맺힌 살을 맞은 것이라고 믿었다.
세조는 분통이 터져 참을 수가 없었다.
“여봐라! 권씨의 무덤을 파헤쳐라! 백골일지라도 토막을 내어 강물 속으로 처넣어라!”
단종의 어머니이고, 자신의 형수이기도 한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까지 범했다.
의경세자를 통해 왕권을 굳건히 하려던 욕심이 물거품이 된 세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날 밤, 권씨의 혼령이 다시 나타나 두 눈을 부릅뜨고 세조에게 침을 뱉었다. 그 꿈을 꾼 다음날, 세조는 피부에 반점이 흉측하게 돋았다. 그리고 평생을 피부병에 시달렸다.
이후부터 세조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가차없이 처벌했다.
백성들은 입과 귀를 막고 살아야 했다. 힘없는 백성들은 새로운 나라, 자유와 평화가 있는 세상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먼 옛날 백제의 발상지이며 첫 도읍지였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은 중랑천 일대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차산 동봉에 백제 시대의 토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면목동, 중곡동 일대가 도읍지였을 것이다.
중랑일대는 살기 좋은 지역이었다. 중랑천에는 물고기와 게가 풍족하였고, 아차산·용마산·망우산에는 봄나물이 지천이었다. 배와 대추, 밤 같은 과실들은 토양이 비옥하여 쑥쑥 잘 자랐고, 수확 또한 많았다. 땅은 기름지고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용마산의 꿩은 사냥하기에 알맞았고, 묵동에서 나는 숫돌은 일품이었다. 봉화산 소나무 참숯으로 만든 먹은 품질이 우수하여 궁중에까지 진상하였다. 그리고 면목동의 너른 들판은 말을 기르고 훈련함에 더 이상 좋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해도 빈부의 차별은 엄연하였고, 신분의 귀하고 천함도 그대로였다.
용마산 밑자락 외딴집에서 돌밭을 일구고 사는 가난한 농부 내외가 있었다.
착하고 부지런한 농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해마다 애를 낳아 보통 7~8명을 거두는 집들을 부러워하며, 농부 내외는 해만 지면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밤새도록 정성껏 애써도 도통 아기는 들어서질 않는 것이었다. 뭘 먹으면 좋다더라, 합궁하기 좋은 날을 잡으라는 둥 많은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따랐지만 모두 헛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낮동안 돌밭을 일구고, 이불 속 밤일까지 치른 농부 내외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달빛이 교교하게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부부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때 달빛을 따라 노인이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키가 훤칠하게 크고, 수염을 배꼽 아래까지 늘어뜨린 백발노인이 큰소리로 부인을 깨웠다.
“어서 일어나거라! 부부의 정성이 갸륵하여 소원을 들어주려고 내가 왔느니라. 당장 이 길로 양원수를 떠오너라. 그리고 금식하면서 3일 밤낮 용마산 바위를 보고 치성을 드리거라. 그리하면 아기가 들어설 것이다. 태어날 아기는 용마산의 정기를 받아 힘세고 명민하여, 도탄에 빠진 이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것이다.”
백발노인의 말을 듣고 있던 부인은 머리를 방바닥에 처박고 벌벌 떨기만 했다.
“단, 조건이 있느니라. 아기가 7살이 될 때까지는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고 키워야 한다. 이를 꼭 지켜야만 아기도 살고, 나라도 구할 수 있느니라! 이 말을 명심하라! 절대로 명심해야 하느니라~.”
말을 끝내고는 백발노인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