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4. 민초들의 희망, 용마산 아기장수②
부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생시처럼 생생하였다.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았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길을 나섰다. 칠흑 같은 길을 달빛이 타박타박 따라오고 있었다.
양원수가 있는 우물을 가려면 십 리는 족히 되었다. 발걸음을 빨리하여도 아낙네 걸음은 느리기만 하였다.
이따금 별을 따러 나선 삽사리 짖는 소리만이 애처롭게 밤하늘을 수놓았다. 달빛을 머금은 배꽃이 화등잔을 켜놓고 있었다. 탐스럽고 요염하였다.
망우고개 쪽으로 들어서자, 저만치 희끄무레한 물체가 어른거렸다. 부인은 머리칼이 바짝 곤두서면서 겁이 났다.
‘아이고, 무서워라! 귀신일까?’
가만히 살펴보니 귀신은 아닌 것 같았다.
자기처럼 물동이를 이고 오는 부인네였다. 서로 마주 본 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말을 건넸다.
“이 밤에 어찌 이런 우연이……. 대체 어디서 오는 뉘시오?”
“난 먹골에 살고 있어요. 여기 양원수로 치성을 드리면 아기가 들어선다기에 봉화산 둘레길을 돌아왔지요.”
“그래요? 나도 치성드리려고 양원수를 뜨러 가는 길이에요.”
“동무 삼아 밤길을 걷게 되어 다행이군요.”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망우고개 밑에 있는 양원리로 들어섰다.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왕릉지를 정하고 돌아오던 길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양원리에 있는 돌로 쌓은 샘물이다. 그 물맛이 어찌나 좋았던지 몇 번이나 떠오게 해서 마시고는,‘양원수’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양원수는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변함없이 늘 그대로 물이 솟아올라 인근 사람들까지 요긴하게 쓰곤 하였다.
두 사람은 양원수를 항아리에 찰랑찰랑하게 퍼담고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부인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농부는 마당에 자리를 폈다. 양원수를 정화수로 삼고 구불구불 절을 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용마산 바위처럼 우직한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신령님께 비나이다.”
농부 내외는 백발노인이 시키는 대로 3일 밤낮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정성껏 치성을 드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지성이면 하늘도 감동한다더니, 농부 아내의 배가 불러오는 것이었다. 농부의 집은 이웃들과 멀리 떨어져 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을 속이기는 어렵지 않았다.
어느덧 열 달이 되었다. 산고 끝에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유달리 우렁찼다.
“오호라! 천하를 호령하고도 남을 장군감이구먼!”
농부 내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이가 돋고, 다음날부터 기어다녔다. 농부 내외는 백발노인의 말대로 큰 인물이 태어났다고 믿었다.
“여보, 어떡하지요? 아기를 어떻게 숨겨 기르지요?”
“그러게 말이야. 밭에 나가 김매기도 해야 하고……. 보통 갓난아이와 다르게 우리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니 좋긴 한데…….”
농부 내외는 아기가 태어난 기쁨도 잠시였다. 근심 걱정으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집에만 있으니 먹을 것도 떨어지고, 걱정이에요.”
부인의 근심에 농부는 마음을 다잡았다.
“먹고 살아야 아기도 키울 수 있으니, 문을 밖으로 잠그고 일하러 나갑시다.”
농부 내외는 밭에 나가 서둘러 김을 매고, 점심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산과 들을 헤집고 찾아도 아기는 보이지 않았다. 아기를 찾지도 못하고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깜짝 놀랐다. 아기가 방에서 천연덕스럽게 잠을 자고 있는 것이었다.
“부인, 참으로 괴이한 일이오. 어딜 쏘다녔을까?”
“그러게요. 이 아이가 장차 어떻게 클지 두려워요.”
말도 못하는 아기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농부 내외는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그 후에도 부부는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밭일을 다녔다. 날이 갈수록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컸다. 곧잘 말도 하게 되었다.
말을 하게 된 아기에게 농부는 차마 꿈속에서 노인이 당부했던 이야기를 해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