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림주막거리, 신 장사의 순애보-1
  • 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5. 우림주막거리, 신 장사의 순애보-1



    가는 세월을 막을 수가 있을까? 말릴 수 없는 유구한 세월은 온갖 풍상을 겪으며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용마산 아기장수가 죽은 지 10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조선왕조에 얽혀 살던 백성들은 얼마나 잘살게 되었을까?
    궁궐 안의 암투는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신하들의 권력 다툼은 밤새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줄줄이 일어난 각종 사화(士禍)로 아까운 인재들이 사약(賜藥)을 받았고, 도적떼 두목인 임꺽정은 의적(義賊)으로 둔갑되어 백성들의 호응을 받을 지경이었다. 더욱이 왜국(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은 7년간이나 계속되어 양반, 상민들을 막론하고 그 목숨들을 쥐락펴락했다.
    현재 ‘우림시장’이 있는 망우동은,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군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망우동 359번지 일대인데, 망우로와 용마산길이 교차되는 곳이다. 이곳은 강원도와 경기도 여주·이천·양평·가평·포천·철원 등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관문이고, 길목이었다.
    풍부한 물과 신선한 풀이 많은 망우고개와 용마산 계곡은 한양 우시장(마장동 우시장)을 드나드는 소장수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왜냐하면, 중랑천을 건너기 전에 먼 거리를 걸어온 소들이 여물을 먹고, 하룻밤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시험을 보러 오가는 선비들이나 장꾼들, 특히 소장수들이 하룻밤 고달픈 몸을 쉬어갈 휴식 공간이 필요하여 자연스레 주막거리가 생겨났다.
    또한 농사일을 끝낸 마을사람들이 모여 막걸리 잔을 돌리며 고달픔을 푸는 장소로도 안성맞춤이었다.
    멀리서 보면 주막거리를 뒤덮은 수많은 소 떼들이 숲을 이룬 것처럼 보여 사람들은 이곳을 ‘우림(牛林)’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도 ‘우림시장’은 서민들의 쉼터이며, 따듯한 인정이 오가는 소박한 장터로 변함이 없다.
    우림주막거리에는, 소를 팔고 받은 돈을 몽땅 잃는 투전판이 벌어지곤 했다. 그리고 예쁜 주모가 있는 주막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기 마련이었다. 때로는 주모 때문에 일 년 지은 농사 절반을 거덜 내기도 했고, 머슴살이를 하고 받은 일 년 새경을 몽땅 갖다 바치기도 했다.
    다른 지역에는 5일장으로 장날만 북적거렸지만, 우림주막거리는 사시장철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어느 날이었다. 떠돌이 놀이패들이 주막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풍물을 요란하게 울리자,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틈타 신명 나는 풍물놀이 한마당을 펼쳤다. 구경꾼들도 어깨를 들썩였다.
    때때옷을 입은 앙증맞은 소녀가 부채를 들고 밧줄 위에 서더니, 신기할 정도로 춤을 추었다. 아슬아슬했다.
    꼬마 소녀의 재주가 끝나고, 잘생긴 젊은 청년이 밧줄 위에 올라섰다. 그는 줄 위에서 요술쟁이처럼 앉았다 일어났다 하더니, 뒤로 넘고 앞으로 넘어지며 자유자재로 구경꾼들을 현혹시켰다. 사람들은 ‘아이코, 아~휴’하며 비명소리를 질렀다.
    그때였다.
    “앗, 소매치기닷! 저놈 잡아랏!”
    소장수가 바지춤을 움켜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날뛰었다. 구경꾼들이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이놈아, 내 돈, 내 돈 내놔!”
    짚신짝을 든 소장수가 덩치 큰 사내를 붙들고 소리를 질렀다.
    “이 사람, 정신이 나갔구먼. 왜, 나한테 그래?”
    덩치 큰 사내가 소장수를 밀치며 주먹질을 했다. 일행으로 보이는 사내들도 합세하여 소장수를 발로 찼다.
    놀이패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에잇! 재수 없어. 별 미친 소장수 같으니라고, 당신 내가 돈 훔친 거 봤어?”
    덩치 큰 사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쩔쩔매고 있는 소장수의 턱을 위로 들어올리며 종주먹을 들이댔다.
    “제발 내 돈 돌려줘요. 소 판 돈이 우리 식구 전 재산이에요. 그리고 중풍 든 노모 병구완 때문에 한 마리 있던 소까지 팔아 마련한 소중한 돈이에요.”
    소장수가 엉엉 울면서 흰자위를 번뜩이는 덩치 큰 사내에게 매달렸다. 구경꾼들은 선뜻 나서서 돕지를 못하고, 안쓰러운 눈길만 보내며 서 있었다.
    “여보시오! 남의 돈을 탐하면 안되지요. 중풍 든 노모, 병구완을 할 전 재산이라고 하잖아요. 얼른 돌려주시오!”
    모여 선 사람들 틈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뭣이라? 누구야, 잡아왓! 어떤 놈인지 혼쭐을 내주마.”
    덩치 큰 사내가 웃통을 벗으며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덩치 큰 사내의 일행들은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여 소리친 사람을 찾아 나섰다.
    “거, 힘 뺄 것 없어요. 나, 여기 있소.”
    소리 나는 쪽으로 구경꾼들의 시선이 우르르 몰렸다. 시선을 받은 얼굴은 앳돼 보였지만 구척장신에 제법 양반집 자제의 풍모를 한 소년이었다.
    “어린 녀석이 어른들 놀이판에 다치려고 나서는 게냐? 얼른 집에 가거라.”
    덩치 큰 사내가 비실비실 웃으며 얕잡아보는 투로 말했다.
    “어른이면 어른다워야죠. 거리에서 추접하게 나잇값을 못하면 아랫사람이 알려드려야죠.”
    구경꾼들은 덩치 큰 사내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할 말을 다하는 소년에게 응원을 보냈다.
    “아무렴, 나잇값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그럼.”
    구경꾼들 틈에서 덩치 큰 사내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불길처럼 퍼지자, 사내는 소년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 글쓴날 : [15-07-13 11:29]
    • 편집국 기자[news@jungnan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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