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5 우림주막거리, 신 장사의 순애보-3
눈이 벌겋게 된 사내는 분풀이를 맘껏 하려는 듯 망나니처럼 굴었다.
“어찌 사람이 그리도 개망나니 같소!”
어느새 나타났는지, 신 장사가 장성한 사내로 변해 서 있었다. 구경꾼들은 신 장사를 알아보고는 흥미 가득한 눈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넌 뭐야? 이래저래 시작했으니, 끝장을 봐야겠구먼. 자, 덤벼!”
사내가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사내는 신 장사의 발차기에 벌러덩 고꾸라졌다.
“망가진 집기를 보상하고 가시오.”
신 장사가 고꾸라진 사내를 다그치며 팔목을 휘어잡았다.
“아얏, 보상을 할 테니 그만 놓아주시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비굴하게 사정을 하였다.
“신 장사, 저 사람이 우림주막거리를 폭력마을로 만들었소. 보상만 하면 안되고 사과도 받아야 해요.”
눈치를 보면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활기가 넘쳤다. 사내는 기가 죽어 굽실거리며 사과를 했다.
겁에 질려 있던 대장장이가 신 장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네 몇 년씩 어딜 갔다 이제 오는가? 자네를 볼 면목이 없네.”
“별말씀을요. 금이 낭자도 잘 있지요?”
대장장이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뭔가를 감추듯 대답을 하였다.
“시집보냈다네. 양반집으로 들어가 살고 있으니 잊어버리게.”
대장장이의 말을 듣고 있던 신 장사는 한동안 그 자리에 장승처럼 서 있었다. 오래 묵혀둔 눈물이 시큼하게 올라왔다. 애써 참고 있던 신 장사의 눈가가 파르르 떨었다. 간직했던 꿈이 산산이 조각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디로 시집갔는데요?”
“자네도 알만한 양반집이라네. 그러니 이젠 다 잊고 좋은 처자 만나 장가가게나.”
신 장사는 발걸음을 터덜대며 우림주막으로 향했다. 신 장사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지면서 사람들이 주막거리로 몰려들었다.
“주모, 탁주 좀 주시오!”
술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던 신 장사가 다시 큰소리로 주모를 찾았다.
“주모, 탁주를 더 가져오란 말이야!”
술을 찾는 신 장사의 모습에 구경꾼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금이 낭자가 어떻게 사는지 알고나 있을까?”
“쉿, 조용히 해. 이 사람아, 혹시라도 신 장사 귀에 들어가면 양반집도 가만 안 둘 거야.”
사람들의 속삭임은 바람에 실려 하늘하늘 날아다녔다.
금이 낭자는, 가난한 집안을 살리기 위해 양반집에 아들을 낳아주는 씨받이로 팔려갔다. 하지만 금이 낭자는 아이를 잉태하지 못해 모진 구박을 받았다. 종살이와 다를 게 없는 생활을 했는데, 주인마님의 눈에 거슬려 명나라로 팔려가는 기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진달래꽃처럼 곱던 금이 낭자의 운명은 보릿고개처럼 서러워 넘지 못하는 험한 고갯길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술에 취한 신 장사는 금이 낭자를 원망하고, 한편으로는 그리워하였다.
고인 물은 썩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옛사람의 그리움을 버리지 못한 신 장사는 새로운 그리움을 찾지 못하고, 날이면 날마다 우림주막에 나와 술로 세월을 죽였다. 술로 그리움을 죽이며 원망을 키웠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 보니, 집안에서도 내놓은 자식이 되어 거리를 헤매는 신세가 되었다.
달이 환한 밤이면 술에 취한 신 장사가 양반집 문 앞에 서서 금이 낭자를 애타게 불렀다. 쏟아지는 별이 눈앞에 아롱대고 삽살개가 왈왈대는 달밤, 연모하는 이를 애타게 찾는 신 장사의 목소리는 눈물에 젖어 은하수로 흘러내렸다.
“금이 낭자! 금이 낭자! 내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매일매일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신 장사를 보면서, 대장장이는 속죄를 하듯 진실을 털어놓았다.
“여보게, 금이는 그 집에 없다네. 나처럼 나쁜 아비는 세상에 없을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그 집에 없다니요? 얼른 말씀해 주세요!”
“궁한 살림에 보탬이 되겠다고 양반집 씨받이로 들어갔는데, 약속대로 아들을 못 낳았다네. 고생만 하다가 명나라로 팔려가고 말았지.”
“뭐라고요? 씨받이로 팔린 것도 애처로운 일인데, 또다시 타국으로 팔려갔다고요?”
“죽지나 말고 살아 있으면 오죽 좋으련만.”
“이놈들을 가만 두지 않겠어요.”
술에 취한 신 장사는 화를 불같이 내면서 양반집으로 달려갔다. 양반집에 도착한 신 장사는 대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대장장이가 따라와 뜯어말려도 소용없었다. 분노한 신 장사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대문 부서지는 소리에 놀란 양반집 종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러나 신 장사의 상대는 못되었다. 몸싸움을 하던 종들이 하나 둘 나가 떨어졌다.
“오밤중에 남의 집 대문을 부수고 행패를 피우는 놈이 누구냐? 이봐라! 저놈을 당장 물리쳐라!”
잠에서 덜 깬 영감이 안방에서 기어나와 소리쳤다.
“철면피 같으니라고! 금이 낭자를 어디에 팔았소? 빨리 말하시오!”
신 장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높이며 영감에게 대들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천한 놈이.”
“사람을 사고파는 것이 벼슬자리 꿰찬 영감이 할 짓이오?”
신 장사가 주먹을 쥐고 영감 앞으로 한발 한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