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림주막거리, 신 장사의 순애보
  • 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5. 우림주막거리, 신 장사의 순애보-4


     

    “여봐라! 당장 저놈을 내치라는 말이닷! 당장.”
    영감이 종들에게 소리치면서 한발 한발 뒷걸음쳤다.
    “이보게 신 장사, 이제 그만하게나. 자네가 그런다고 금이가 살아오는 것도 아니잖는가.”
    대장장이는 허깨비처럼 가벼운 몸에 힘을 주고, 신 장사 앞을 가로막으며 사정했다. 대장장이의 간절한 마음을 읽은 신 장사가 한참 망설이다 뒤돌아서 우림주막을 향해 걸어갔다. 신 장사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날 이후로 약한 사람들의 편이 돼주던 신 장사의 예전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매일 술에 취해 방황하는 신 장사를 주막거리 사람들은 슬슬 피하고 손가락질을 하였다. 용마산 아기장수로 믿고 환호했던 자신들이 사람을 잘못 봤다며 수군댔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신 장사의 머리에는 시간의 무게만큼 양반들을 향한 분노가 쌓여갔다.
    푸르스름한 하늘에 눈발이 하늘하늘 날렸다. 까치밥을 쪼는 새들의 날갯짓에 눈송이가 흩날리면서 꽃송이처럼 떨어졌다.
    일찍 잠에서 깬 신 장사가 주막집 문간방 문을 열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참, 소담하게 쌓이는구먼. 저 눈길을 밟고 찾아오는 이가 있다면 좋겠는데,  금이 낭자가 온다면 오죽 좋을까.”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신 장사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방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계세요? 잠깐 쉬어가도 될까요?”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 장사는 소리 나는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치렁치렁 겨울옷을 껴입은 여자가  잔뜩 웅크린 자세로 서 있었다.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던 두 사람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당신, 맞지요? 금이 낭자가.”
    대답 대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을 날리며 신 장사가 맨발로 뛰어나가 금이 낭자를 가슴에 꼭 껴안았다. 순간 모든 것들은 숨쉬기를 멈추고, 두 사람의 그리웠던 시간들을 뒤로뒤로 돌리고 있었다.
    “누추한 방이지만, 따듯하니 들어가서 몸을 녹입시다.”
    신 장사가 금이 낭자의 손을 이끌고 문간방으로 들어갔다.
    내외를 하느라 돌아앉은 금이 낭자를 바라보던 신 장사가 살며시 차가운 손목을 잡아끌었다. 꽁꽁 언 손에 입김을 불던 신 장사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곱디고운 손이 어찌 이리 변했소. 고생이 얼마나 심했기에…….”
    금이 낭자의 어깨가 들썩이며 파르르 떨었다. 좁은 문간방을 가득히 메운 숨막히는 설움의 눈물은 그동안의 원망과 그리움을 씻어내고, 새로운 그리움을 키워냈다.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좀 쉬고 있어요.”
    신 장사는 방을 나와 아궁이에 꺼진 불씨를 살려 군불을 지폈다.
    매캐한 연기가 스며드는 방 안을 둘러보던 금이 낭자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주모, 어서 일어나요. 얼마나 어여쁜 눈이 왔는데, 아직도 자고 있소.”
    신 장사가 눈길을 만들면서 덤벙거렸다.
    “게으른 신 장사가 어쩐 일로 새벽부터 일어나 눈까지 쓸었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잠에서 덜 깬 주모가 쪽문을 열고 투덜거렸다.
    “어제까지의 신 장사는 잊어버리시오. 오늘부터는 돈도 벌 테요. 하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새롭게 활기가 태어나듯 우림주막이 꿈틀거렸다. 바람에 날리는 눈송이는 무희들의 춤사위처럼 아름다웠다. 햇살이 내리쬐는 처마에 고드름이 은구슬을 똑똑 떨어뜨렸다.
    “금이 낭자, 이젠 일어나 아침 먹읍시다.”
    밥상을 든 신 장사가 금이 낭자를 깨웠다.
    “내가 나가 있을 테니, 천천히 체하지 않도록 들어요.”
    신 장사는 주모에게 금이 낭자를 부탁하고, 사립문을 나왔다. 술로 세월을 보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우림주막거리는 한산했다. 주막사람들의 한숨소리는 깊어졌고, 구걸하는 사람들은 쉰밥이라도 얻어먹으려고 싸움을 벌였다. 약한 사람들은 가진 것을 강한 사람에게 뺏기고, 억울함을 참느라 마음속에 시퍼런 칼을 갈고 있었다.
    ‘그나저나 금이 낭자에게 돌아가신 아버님 소식을 어떻게 전해 준담?’
    금이 낭자의 아버지 대장장이는 건달꾼에게 두들겨 맞고, 병들어 돌아가셨던 것이다.
    신 장사는 우림주막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어쩐 일로 신 장사가 오늘은 술을 찾지 않네. 살다 보니 별일을 다 보는구먼.”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 장사는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를 하였다.
    “이젠 술은 먹지 않아요. 이 거리는 오늘부터 새로 태어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신 장사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도 있고, 용마산 아기장수처럼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고 다시 신 장사가 왔다는 사람들로 주막거리는 수선스러웠다.
    “이봐 신 장사, 매일같이 찾아와서 자릿세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는 건달들을 멀리 보냈으면 좋겠네. 그럴 수 있겠나?”
    “보내봤자 다른 데서 또 그럴 것 아니에요. 버르장머리를 싹 고쳐놔야지요. 걱정 마세요.”
    “그렇게 된다면야 고맙지. 하지만 여기저기 다니면서 행패를 피우던 놈들인데, 고쳐질까? 본성이 본디 악한 놈들인걸.”
    “못된 주먹은, 정의로운 주먹한테는 꼼짝 못해요.”
    주막거리 사람들은 예전의 신 장사로 돌아왔다며 환호를 하고, 어깨에 힘이 실렸다. 손님을 부르는 소리에도 힘이 넘쳐 주막거리가 왁자하였다.

  • 글쓴날 : [15-08-07 17:01]
    • 편집국 기자[news@jungnang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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