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5. 우림주막거리, 신 장사의 순애보-5
한편 아침을 먹은 금이 낭자는, 들고 온 낡은 보따리를 챙겨 문밖으로 나왔다. 이를 본 주모가 보따리를 빼앗아 방 안으로 밀어넣으며 금이 낭자를 붙잡았다.
“신 장사가 절대 보내지 말라고 했으니, 가면 안된다니까….”
“난 갈 데가 있어요. 신 장사에게는 나중에 소식 전하지요.”
“아가씨가 오고 나서 신 장사가 마음을 다잡았는데, 가면 어떡해요? 주막거리 사람들도 신 장사를 보고 다시 힘을 냈는데, 그냥 여기서 신 장사와 살면 안될까요.”
금이 낭자가 떠나면 신 장사는 다시 게으른 식객으로 돌아갈 것이 뻔하였다. 그래서 주모는 머무를 것을 사정하였다.
“아버지를 만나야 해요. 오랫동안 뵙지를 못했는데.”
“모르셨어요? 대장간은 이미 없어졌어요. 아버지도 돌아가셨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요?”
흙담이 빗물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금이 낭자가 주저앉았다.
“행패를 피우던 건달꾼에게 두들겨 맞고,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오. 신 장사가 장사를 다 치르고, 양지바른 곳에 잘 모셨다오.”
금이 낭자는 땅바닥에 이마를 대고 통곡하였다. 그녀의 야윈 몸은, 내린 눈처럼 처연하게 슬퍼보였다.
“그러니 신 장사 말처럼 들어가 쉬면서, 몸을 회복하도록 해요.”
주모가 금이 낭자를 부축하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금이 낭자의 멈추지 않는 흐느낌에 주막 손님들도 혀를 차며 한탄하였다.
“쯧쯧, 신 장사를 버리더니 집안에 망조가 들었구먼. 그나저나 환향녀가 되어 돌아왔으니….”
“저런 환향녀를 여태 기다리느라 술로 세월을 보낸 신 장사가 불쌍해. 알아서 하겠지 뭐, 우린 밥이나 먹세.”
그때 사립문으로 들어선 신 장사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자초지종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남의 말을 함부로 하는 거요. 썩 꺼지시오!”
신 장사가 소리를 지르자, 수군대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금이 낭자가 바깥에서 일어난 소란을 듣고는 다시 보따리를 들고 문을 열었다. 이를 본 신 장사가 금이 낭자를 붙들면서 소리쳤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소. 낭자라고 좋아서 팔려갔겠소. 내가 알고 있으면 되잖소.”
“놓으세요. 저는 환향녀입니다. 그러니 놔두세요. 제가 옆에 있으면 신 장사님은 늘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을 거예요.”
“아니, 내가 괜찮다고 하잖소. 낭자만 옆에 있다면 나는 불구덩이도 뛰어들 수 있단 말이오. 알겠소?”
“신 장사님께 죄를 지었는데, 내가 편하자고 어찌 앞길을 막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 나 같은 건 잊어버리고 새 출발을 하세요.”
“그리는 못하오. 내 청춘을 술로 보내면서 썩힌 것도 비통한데, 또다시 그 세월로 돌아갈 수는 없소.”
신 장사가 울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금이 낭자도 방바닥에 엎드려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달빛을 받은 나뭇가지에는 눈송이들이 목련꽃처럼 등을 밝히고 있었다. 쪼그라진 몸으로 휘적휘적 걸어오는 신 장사의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불을 켜지 않은 문간방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불길한 예감이 든 신 장사가 와락 문고리를 잡아당겨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컴컴한 방 안에는 사람의 온기라고는 없었다. 서둘러 등잔에 불을 켜고 방 안을 살폈다. 방 가운데 금이 낭자가 써놓은 유서가 보였다.
‘신 장사님, 그리움도 원망도 다 잊어버리시고, 이젠 새로운 그리움을 만나 행복으로 채우십시오. 부디 용마산 아기장수의 기를 받아 새 나라를 만드십시오. 저의 죗값은 용마봉의 기를 모아서 치르겠습니다. 훗날 좋은 세상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유서를 읽는 신 장사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신 장사는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용마봉을 향해 눈길을 달렸다.
신 장사가 달려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금이 낭자는, 낭떠러지에 서서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울고 난 금이 낭자는 우림주막을 향해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두려움을 감추듯 눈을 감고 낭떠러지에서 몸을 날렸다.
금이 낭자의 몸이 춤추듯 눈송이처럼 하느작거렸다. 얼마를 떨어졌을까? 저승길이 따듯하고 편한 줄을 새삼 알게 된 금이 낭자가 눈을 살그미 떴다.
“낭자, 우둔한 짓을 했구려. 낭자는 다시 살아났으니, 새로 태어난 것이오. 낭자의 생명을 살린 내가 이젠 낭자를 관리하겠소.”
신 장사의 눈물방울이 금이 낭자의 눈 속으로 촉촉이 젖어들었다. 진심을 알게 된 금이 낭자가 신 장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신 장사님, 저와 약속 하나 해 주세요.”
“무슨 약속이라도 하겠소.”
“무과에 응시하세요. 그리고 급제를 하시면 함께 살겠습니다.”
신 장사는 잠시 대답을 멈칫거렸다. 금이 낭자를 씨받이로 사간 양반집을 향했던 분노가 떠올랐다. 그리고 힘없는 여인이 팔려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 벼슬아치들에 대한 원망이 북받쳤다.
하지만 금이 낭자와 살려면, 벼슬길로 나가야 했다.
“알겠소. 낭자를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바치겠소.”
신 장사는 무과를 준비하면서도 틈틈이 주막거리에서 소란을 피우고 도둑질을 일삼는 건달들을 단속하였다.
이제 우림주막거리는 각지에서 몰려온 소장수들과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