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6. 삼전도 굴욕, 북벌의 꿈을 키운 중랑포②
청 태종은 다음해인 1월 1일 병력을 20만 명으로 늘리고, 남한산성 밑에 있는 탄천에 주둔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싸움을 걸어오지 않고,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지구전을 펴고 인조를 괴롭힐 속셈이었다.
폭설이 내리고, 폭풍이 번갈아 몰아치면서 40여 일이 지났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성 안의 식량은 점점 떨어지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청군과 싸울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더욱이 인조를 도우러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각지의 조선군이나 의병들은 청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도주하기 바빴다.
“전하, 각지에서 모여든 군사들이 청나라 군사들에게 패하고 도주하였다고 아룁니다.”
“또 패했다는 말이오?”
“더는 이대로 견디지 못할 것 같사옵니다.”
실망하는 인조의 용안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그때 다급하게 내관이 달려와 아뢰었다.
“전하, 의병들이 청나라 군사들에게 패하여 전멸하였다고 합니다.”
“그만! 그만하시오. 그나저나 명나라 지원군은 어떻게 되었소?”
“명나라 군사들의 소식은 아직 올라온 것이 없습니다.”
“이런! 쯧쯧쯧.”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절망적인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청군은 매일같이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며 항복을 종용했다.
나라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도 신하들은 또다시 목숨을 건 명분 싸움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와 협상을 해보자는 주화파로 패가 갈려 매일 격렬한 탁상공론만 벌였다.
“돼지만도 못한 오랑캐들에게 무슨 협상? 싸우다가 죽는 게 신하된 도리입니다!”
“아니 그럼, 싸우다가 모두 죽으면 나라는 어찌되겠소? 저 착한 백성들은 어떡하고?”
“언제부터 대감께서 백성을 돌봤소? 나 원 참, 혼자 잘난 척하지 마시오.”
“내가 잘난 척을 하였다고요? 말씀을 가려서 하세요. 전쟁이라면 꽁무니만 빼는 대감께서 뭐 싸우다 죽자고?”
“꽁무니요? 말씀 다하셨습니까? 대감!”
신하들의 말싸움을 지켜보던 인조가 호통을 쳤다.
“그만, 그만하시오. 모름지기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여서는 안된다는 것 아시잖소. 쓸모없는 언쟁은 그만하세요.”
“황공하옵니다, 전하.”
인조의 뼈있는 말 한마디에 흐트러진 자세로 싸우던 대신들은 몸가짐을 다듬느라 헛기침을 하였다.
“싸워서 이길 방책은 있는 것이오? 싸우다가 죽는 거 말고 방법이 없단 말이오?”
인조가 눈물로 대책을 호소했지만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하, 민심이 흉흉하여 성 안에는 도둑이 날뛰고 백성들과 군사들이 불안해하고 있사옵니다.”
“전하, 이대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용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인조는 할 수 없이 항복을 결심하고, 협상을 주장하는 주화파 신하들을 청군 진영으로 보내 항복 절차를 협상하기에 이르렀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말했다.
“항복에는 전부터 규정과 제도가 있소. 으뜸절목(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짊어지고 나가는 것)은 참담하니, 둘째절목으로 하겠소. 위엄 있는 용포차림은 안되고, 군사의 호위도 받을 수 없소. 또한 죄인은 정문으로 나올 수 없으니 서문으로 나오시오.”
인조는 용골대의 지시대로 1637년 1월 30일 남색 전복 차림으로 세자와 함께 서문을 통해 성을 나섰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지 47일 만에 일어난 굴욕이었다.
청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리기 위해서, 지금의 서울 송파구 석촌동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서릿발 같은 바람이 인조의 초라한 옷깃으로 파고들었다.
멀리 바라보니 높다란 수항단(受降壇)에 청 태종이 황옥을 펼치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갑옷과 투구 차림에 칼과 활로 무장을 한 군사가 좌우에 서 있었고, 악공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인조가 백 보를 걸어서 수항단 앞에 이르렀다.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고 하면 길다. 이제라도 용단을 내려 여기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청 태종의 말에 인조가 대답했다.
“천은이 망극합니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평지에서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의 예를 올렸다. 삼배구고두란,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 머리를 땅바닥에 찧는 예를 세 번 하는 것이다.
인조는 얼어붙은 땅에 머리를 부딪쳐 절을 하였다. 인조의 이마는 피범벅이 되었다. 약소국의 설움이 흘린 핏물은 한과 눈물이 되어 얼어붙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인조는 땅바닥에 엎드려 오랑캐들을 받들겠다는 항복문서를 바쳤다. 과거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이민족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순간이었다.
하늘은 성난 파도처럼 부서져라 눈발을 날렸다. 살이 찢기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명나라와 단절을 하고, 청나라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며, 군사와 물자를 지원하고, 해마다 세폐(공물)를 바치게 되었다. 청나라에 복속하게 된,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봐라, 청나라에서 만들어준 국새를 공식 대보(大寶)로 사용하도록 하고, 명나라에서 받은 국새는 반환하도록 하라.”
한 나라의 국권과 정통성의 상징인 국새는, 훗날 갑오경장(1894년) 이후 고종황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 손으로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다. 그동안 조선은 청나라가 준 국새를 외교문서에 찍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세운 지 246년, 조선의 왕이 적장 앞에 나가 몸소 항복한 일은 인조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