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6. 삼전도 굴욕, 북벌의 꿈을 키운 중랑포③
임진왜란도 치욕의 역사이지만, 세계 해전 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추앙받는 이순신이 있었기에 항복은 면했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어이없이 오랑캐에게 당한 비참한 환란이었다.
사실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가 하면 떠올리기 치욕스러운 역사도 있다. 그러나 어제를 보면서 내일을 여는 것이 또한 역사가 아니던가!
목마른 꽃들도 가뭄이 든 날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는 뜨거워서 먹지 못한다. 이런 극한 상황처럼 역사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만이 굴욕을 모면하는 방책인 것이다.
병자호란은 군사적 피해 못지않게 백성들의 피해도 막심했다.
청나라는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고 철군하면서 세자와 세자빈을 비롯 대군(인조의 아들)들을 볼모로 잡아갔다. 그리고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 신하들과 50만 명에 달하는 부녀자를 포로로 끌고 갔다.
여자들을 끌고 간 목적은, 돈을 받고 되팔려는 욕심에서였다. 그렇지만 끌려간 여자들이 대부분 빈민 출신이라, 아내와 딸들을 비싼 값에 되찾아오기는 어려웠다. 딸과 아내를 잃은 슬픔에 남겨진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포로로 잡혀간 여자들이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압록강을 건너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아주지를 않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킨 여자들도 많았지만, 집집마다 이혼 문제로 시끄러웠고 사회를 혼란시켰다.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벼슬아치들은 연약한 여자들에게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고 탓을 하면서 손가락질을 하였다. 정치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였던 것이다.
심지어 자녀목(恣女木)과 도모지(塗貌紙)까지 행해지는 끔찍한 일도 있었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면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게 하는 나무가 자녀목이고, 물에 젖은 한지를 얼굴에 발라 질식시켜 죽이는 것이 도모지다.
참으로 한심하고 기막힌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슬픈 여인들은 한과 눈물을 삭혀야 했고, 조선의 역사는 고난으로 끈질기게 이어졌지만, 그 흔적과 상처 역시 아물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봉림대군(훗날 효종 임금)도 볼모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는 패전국 조선의 왕자라는 이유로 청나라 관리들에게 온갖 멸시를 당하였다. 또한 청나라가 일으킨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명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그럴 때마다 봉림대군은 청나라를 정벌할 야망을 키웠다. 청나라 지리를 익히고, 마음과 몸가짐을 조심하였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1645년, 끌려갔던 포로들이 풀려나게 되었다.
봉림대군도 조국의 품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실로 8년 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4년 후인 1649년 5월 인조가 승하하자, 조선 17대 임금 효종으로 등극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편전회의를 열었다.
“짐이 해야 할 화급한 일이 무엇이라 보시오?”
대표적인 주전파이면서 청나라를 혐오하는 송시열이 말했다.
“삼전도 굴욕을 씻는 것이라 아뢰오.”
“그래요? 어찌해야 씻을 수 있겠소?”
“군사력을 강화하여 청나라를 정벌하고, 굴욕을 되갚으면 되는 일인 줄 아뢰오.”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신하들은 효종이 청나라에게 반감이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도 송시열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효종은 송시열의 북벌론을 근거로 북벌계획을 착수하였다. 청나라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탓이었다.
‘옛 고구려의 드넓은 만주 벌판을 반드시 내 손으로 찾아 오욕의 역사를 되돌려 주고 말 테다.’
효종은 이를 갈면서 잠도 잊은 채 밤낮으로 계획을 짜느라 고심하였다. 그는 문관보다는 무관을 중용하였다. 힘이 있어야 나라도 지키고, 백성들도 지킬 수 있잖은가. 힘이 없으면 삼전도의 굴욕을 다시 당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사정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하여 조직을 강화하였다. 임금의 호위를 맡은 금군을 기병화하면서 군사도 6백 명에서 1천 명으로 증강시켜 왕권을 강화시켰다. 한양 성곽을 수리하고, 외곽에 있는 산성의 방비를 보강하였다.
면목동과 상봉동에 있는 성지를 수리하고, 봉화산의 봉수대도 대폭적으로 수선을 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중앙군인 어영군을 2만 명, 훈련도감 병력을 1만 명으로 증가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나선(지금의 러시아) 정벌을 감행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고, 백성들에게 조선인의 긍지를 심어주었다.
효종의 북벌계획은 쉬쉬하며 진행되었다. 청나라가 눈치를 채면, 필시 사단이 벌어질 것이었다. 그래서 군사들의 훈련장소를 은근히 물색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효종은 건원릉을 참배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속계교를 지나 망우고개를 넘어 참배를 하고 돌아올 때였다. 갈 때는 보이지 않던 넓은 백사장이 효종의 눈앞에 펼쳐졌다.
“여봐라! 어가를 멈춰라!”
효종이 다급하게 소리치면서 발을 굴렀다.
“전하! 무슨 일이신지요?”
호위대장이 달려와 어가를 멈추게 하고, 효종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이곳이 어디인고?”
“전하, 여기는 우이천과 묵동천이 합류되는 지점으로 중랑포라 부릅니다.”
효종은 중랑포 지형을 몸소 살폈다. 그리고는 손뼉을 치며,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곳이야말로 효종이 목마르게 찾던 장소였다.
‘옳지, 여기야. 여기야말로 북벌계획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다.’
효종의 마음을 읽은 듯 호위대장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전하, 여러 가지 여건상 한강변보다 이곳이 훨씬 유리한 것 같습니다. 전하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효종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용안에 미소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