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6. 삼전도 굴욕, 북벌의 꿈을 키운 중랑포④
중랑포는 두 개의 큰 내가 합쳐지는 곳으로 마치 바닷가와 같았다. 넓은 백사장과 물이 깊어 배를 띄울 수 있기에 도강(渡江)연습도 가능한 곳이었다. 현재 묵동 233~240번지 일대가 된다.
더욱이 조선시대 중랑천 하류지역은 나라에서 말을 기르던 목장지대였다. 그중에서도 살곶이목장은 동쪽으로 아차산과 용마산, 북쪽으로 면목동을 가로지르고, 서쪽으로는 배봉산, 남쪽으로는 한강변에 다다를 만큼 광활했다.
중랑포는 살곶이목장이 인근에 있어서 금상첨화였다.
환궁한 효종은 즉시 박연을 불렀다. 박연은 원래 네덜란드 선원으로 본명은 벨테브레였는데, 조선에 귀화하여 조선 이름을 쓰고 있었다.
박연은 배를 타고 일본을 향하던 중 풍랑에 휩쓸려 제주도에 표착했다. 동료 선원 2명과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상륙하였다가 관헌에게 붙들려 서울로 호송되었고, 이후 귀화하여 조선 여자와 결혼하고 남매를 낳아 조선인으로 살고 있었다.
병자호란에는 친구들까지 출전하여, 친구 2명은 전사하고 혼자 살아남은 인물이기도 하다.
효종 앞에 부복해 있는 박연을 바라보며 임금이 입을 열었다.
“짐이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무기를 개발하고, 군사들을 훈련하는 중책을 맡기려고 하는데, 공의 생각은 어떤가?”
박연은 어쩔 줄 모르고 대답했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무슨 일이든 맡겨 주신다면 성심을 다하여 따르겠나이다.”
“짐은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를 응징하고 복수하려고 결심했소. 그러니 짐을 도와 과업을 완수하여 친구들의 원수도 갚도록 하시오.”
“전하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오늘부터 훈련도감에 배속하여 홍이포(서양식 대포)의 제조와 조작법을 지도하기 바라오. 그리고 수석식총(심지에 불을 붙이는 조총을 개량해 부싯돌로 점화하는 총)을 만드는데 힘쓰시오.”
“충심으로 받들겠나이다.”
효종은 조총과 화포 등 신무기를 개량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필요한 화약 생산을 위해 염초 재배를 확충하였다.
이때 만든 신무기의 연습 사용지가 바로 중랑천변 중랑포였다. 연습장소로 선택한 중랑포는 넓고 단단한 모래밭인데다가 인적이 드물어 안성맞춤이었다. 실전이 벌어졌을 경우, 때에 따라서는 전투장소를 배 위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에 수전(水戰)에 대비한 것이었다.
효종은 중랑포에서 군사훈련을 한다는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지는 것을 염려하여 건원릉(동구릉)으로 능행한다는 구실로 훈련을 참관하였다. 효종이 충심으로 나라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에서 중랑포를 충랑포(忠浪浦)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효종은 삼전도의 치욕을 되새기며 평생 살았다. 북벌에 집념하여 군비 확충에 전력을 쏟은 군주였다.
드디어 출병의 날이 다가왔다. 대소신료들과 온 백성이 하나가 되어 이 날을 기다려왔다.
“자! 드디어 때가 왔다. 복수의 칼날을 오랑캐의 가슴에 꽂으러 가자!”
“와아! 와아!”
“만주는 우리 땅이다.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고, 중원(중국 청나라의 본거지)을 정복하자.”
“와아! 와아!”
“우리도 청 태종에게 항복을 받아 내자!”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드높았다. 이제 압록강을 건너 만주 벌판을 향해 말달리는 일 말고 다른 생각은 없었다. 만리장성을 넘어 청나라를 초토화시키자는 열망이 가슴, 가슴마다 들끓었다.
군사들의 높은 사기에 찬물을 끼얹듯 갑자기 궂은비가 추적거리며 내렸다. 중랑포에 핀 오월의 꽃들이 거센 비바람에 흔들리면서 젖은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왠지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다.
아니나 다를까, 궁궐 안 근정전에서 곡소리가 났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효종이 승하한 것이다. 1659년 5월, 그의 나이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결국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북벌의 뜻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효종이 확립한 군사력은 조선 사회를 안정시키는 기반이 되어 한동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다만 고종 임금까지 이어지지 않아 일본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다.
효종 이후에도 임금들은 북벌에 뜻을 두었으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청나라 국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했다.
조선왕조는 대략 500년간 존속했다. 그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1200년간, 오스만제국은 600년간, 왕조로는 에스파냐왕국만이 유일하게 500년 동안 이어졌다. 이들 3국 말고는 500년 동안 역사를 이어온 나라가 하나도 없다.
조선왕조 500년은 참으로 긴 동안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뿐만 아니라, 고려도 약 500년간, 신라 1000년의 역사에 고구려와 백제가 각각 7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 지역에서 이렇게 장기간 왕조로 이어진 나라는 세계 역사상 하나도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땅의 백성들이 권력에 굴종하고 산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거의 25년 만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났다. 민란은 대개 백성들이 권리를 주장하거나, 나라를 걱정하는 충언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 나라 백성들은 성품이 선하고 강직하여 외적이 침입하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했다. 그만큼 권리의식이 강했고, 나라의 주인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은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을 후손들에게 남기지 않았다.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려면 수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이 요구되기 때문에 그런 일에는 과감히 항거하였던 것이다.
그 대신 수많은 기록 유산을 남겨 주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승정원일기’ 등 전 세계에서 우리 선조들만이 남긴 유일한 기록물이다.
효종의 거대한 야망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러나 때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큰 꿈을 가진 영도자가 나타나 선조들의 원수를 갚고, 조선의 꿈, 아니 대한민국이 웅대한 날개를 펴는 날, 세계 속의 중심국가로서 영광된 자리에 우뚝 설 날이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중랑포는 미래를 향한 요충지이다. 꿈이 영그는 날, 유토피아는 반드시 대한민국의 몫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