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안재식 작가가 들려주는 '중랑의 설화
봉화산 별감 최 내시-성종의 여인
도둑처럼 가을이 왔다.
삼복더위로 땀을 쥐어짠 들녘은 황금빛으로 일렁였다. 때를 맞춰 멧돼지들은 들판을 헤집고 다니며 흉측한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은 백성들의 한숨으로 이어지고 눈물로 얼룩졌다. 어디 멧돼지뿐이랴. 부패한 관리와 탐욕스런 지주들의 횡포는 날로 민초들의 가슴에 시퍼런 멍을 만들어냈다.
무릇 정치란 무엇인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정치요, 백성이 고통 받는 모습을 차마 못 보는 것이 정치의 덕목이다.
맹자(孟子-BC 4세기경 중국 전국시대 사상가)는 일찍이 ‘백성 하나 못 먹이는 왕은 필부(匹夫-평범한 남자)’에 불과하다고 했다. ‘백성의 하늘은 왕이 아니라 식량’이라며 ‘민심은 천심(하늘의 소리)이기에 민심을 잃은 왕은 바꿀 수 있다.’고 왕도 정치론에서 밝혔다.
정도전(鄭道傳)은 맹자 사상의 신봉자였다. 그는 백성의 행복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재상 중심의 왕도 정치 실현을 꿈꾸었다. 고민 끝에 떠올린 묘안은, 무인으로 용맹을 떨치던 이성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620여 년 전, 이성계는 정도전의 뜻을 따라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일으켰다. 조선왕조를 세운 것이다.
정도전은 틈만 나면 이성계와 왕자들에게 왕도 정치를 가르쳤다.
“무릇 왕이란 꽃이요, 뿌리는 재상(宰相-벼슬아치)입니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으면 꽃은 시들고 맙니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함께 바른 정치를 펴고자 했다. 그러나 왕자들의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그럼 재상들의 꼭두각시가 왕이란 말이냐? 천만에 말씀, 자고이래(自古以來-예부터 지금까지) 그런 역사는 없다.”
왕자들은 날이 갈수록 불평이 잦아졌다.
결국 ‘왕의 바른 길’을 가르치려던 정도전의 꿈은, 이성계의 다섯째아들 이방원에게 난도질을 당해 물거품으로 끝났다. 죄명은 ‘종친 모해죄’였다.
돌이켜보면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이었다.
꽃의 뿌리를 재상이 아닌 백성으로 삼았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 벌써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있었을 테니까.
조선 9대 임금 성종은 일찍 죽은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의 둘째아들이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한명회의 사위가 된다.
한명회(韓明澮)는 칠삭둥이로 모사에 능한 책략가로 전해진다. 단종을 내쫓을 때 살생부(殺生簿-죽이고 살릴 사람의 명단)를 만든 주인공으로 일등공신이다. 그는 두 딸 중에서 첫째딸은 예종의 왕비(장순왕후)로, 둘째딸은 12살 어린 나이에 성종의 왕비(공혜왕후)로 시집보내 두 왕의 부원군(府院君-왕비의 아버지)이 되었다.
예종과 성종은 숙질간이 된다. 그러므로 한명회의 두 딸은 자매면서도 시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기묘한 관계를 맺게 된 셈이다.
이미 예종에게 두 아들이 있었고, 의경세자(예종의 맏형)에게도 맏아들(월산군)이 있었으나, 이들을 물리치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장인 한명회의 그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의 왕비 한씨에게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왕위를 물려받을 자식이 있어야 대를 이어 부와 권력을 누릴 것이 아닌가. 한씨 부녀는 그게 늘 걱정이었다.
남몰래 고승을 찾아가 불공을 드리고, 용하다는 무당에게 치성을 해도 아기가 들어서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한명회가 딸에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자주 처소에 납시는지요?”
한씨는 대답 없이 흐느끼기만 하였다.
“울지만 말고 말씀을 해보세요.”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납니다. 흑흑.”
“저런, 저런!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딸 텐데…….”
독수공방으로 지내던 한씨는 17살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한씨가 죽자, 성종은 얼마 되지 않아 당시 후궁이던 숙의 윤씨(나중 폐비가 된 연산군의 생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나이 든 한명회도 딸의 요절을 겪으면서 권세의 무상을 느꼈다. 부귀와 영화가 늙음을 지체할 수는 없는 것,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어디 있던가. 권좌에서 물러난 그는 갈매기를 친구삼아 한가롭게 지내고 싶다면서 자신의 아호를 붙여‘압구정’이란 정자를 지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갈매기를 벗하는 곳이 아니라, 권력과 벗하는 곳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당대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한명회도 성종의 아들 연산군이 즉위한 후,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 폐위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죄인의 관을 쪼개어 시신의 목을 베는 것)를 당하였으니, 업보 치고는 참담하였다.
성종 시대는 조선 건국 이후 최초로 맞이하는 태평성대였다. 전란도 없었고, 내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성종은 실록에 나오는 왕비, 후궁만도 12명이나 된다. 자식들도 16남 12녀로 도합 28명이다. 염복(艶福)도 많고, 자식농사가 풍년인 왕이었다.
또한 궁궐 안에 있는 궁녀들은 모두 왕의 여인이다. 왕의 마음이 움직이면 누구든지 하룻밤 품에 안고 운우(雲雨)의 정을 나눠도 되는 여인들이다. 생각시(예비 궁녀)나 무수리(허드렛일을 담당)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승은(承恩-왕의 사랑을 받아 동침함)을 입은 궁녀는 다음날 아침, 치마를 둘러 입고 나오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를 알린다. 왕과의 한 번 정사에 그녀는 후궁이 되거나, 최소한 특별상궁이 되어 신분이 상승하는 것이다.
상궁의 첩지를 받으면 궁 안에 방 하나와 세간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마마님’소리를 들으며 밥 짓고, 빨래하는 사람을 따로 두도록 하였으니, 특별한 진급이나 마찬가지였다.
상궁은 궁녀의 꽃이다. 궁녀들은 모두 꽃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대부분 상궁이 되지 못하고 늙어갔다. 상궁이 된다고 해도 궁궐에 갇혀 사는 입장은 변함이 없기에 궁녀들의 삶은 외로움, 그 자체였다.
어느 궁녀는 서러운 심정을 시조로 읊었다.
연못에 든 고기들아 누가 너를 가두었냐
북쪽 바다 어디 두고 이 연못에 와 있느냐
들어와 못나가는 너와 나 무엇이 다르랴.
궁녀들에게는 엄한 규칙이 있어 환관(宦官) 이외의 남자와 절대로 접촉하지 못하게 하였다. 평생을 수절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궁녀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왕이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후궁들도 어느 처소로 왕의 발걸음이 떨어질까, 밤이면 밤마다 귀를 쫑긋 세웠다. 나인(본딧말은 내인)들을 닦달하여 수소문을 하게 했다. 욕정이 그녀들을 안달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 왕을 맞이하여 운수 좋게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낳으면 그야말로 팔자가 늘어질 노릇이니, 아니 그럴 수 있겠는가.